우린 그녀를 '초미녀 작가'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녀의 첫 인사가 그랬다고 우린 주장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자신이 먼저 초미녀 작가라고 소개한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지금 일본에 갔습니다. 다산인권센터 매체편집팀장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훌쩍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놓아 줄 수 없었기에 이렇게 좌충우돌 초미녀 작가의 일본생활을 <다산인권>을 통해 만나려 합니다. 그녀는 박선희입니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군거림이나 돌아봄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
오사카에 온지 열 달이 되었다. 처음 한 두 달 정도, 함께 장을 보러가거나 식당에 가면 남편의 행동이 과하게 조심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남편은 나와 아이보다 세달 가량 먼저 일본에 와 있었다. 세 달 만에 만난 남편은 무언가에 잔뜩 주눅이 든 느낌이었는데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창피한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틈만 나면 스미마셍을 연발했다. 내심 그런 남편이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요즘엔 함께 외출을 하면 내가 더 그 소리를 많이 해 때때로 놀라곤 한다.
처음 얼마간은 이방인으로 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도,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여행자 같은 생활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주었다. 나는 외국인이니까 적당히 모른 척, 무엇에든 거리를 두고 지내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몇 년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 왔다. 몇 년을 여행자처럼 뒷짐 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족한 일본어 실력은 어딜 가나 폐가 되었다. 번번이 주위에 답답함을 안겨주며 살 수는 없으니 나는 생활인의 자세로 돌아와야 했다. 생활인으로 돌아오고 나니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쓰인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지하철, 버스, 식당, 공원 할 것 없이 어디에서건 아이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이 흘끗 돌아본다. 어떤 사람들은 한번 돌아보는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관찰한다. 처음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반복 되다보니 사람 많은 곳에서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거나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 아무 적의 없는 시선일지라도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견뎌내야 하는 피곤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름에서 시작된 주목이기 때문에 나의 행동에 따라 언제든 그 시선이 적의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조심스럽다.
한번은 놀이터에서 아이가 “엄마, 와서 그네 밀어줘!”라며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가갔는데, 아이 주위에 있던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 보이는 개구쟁이들이 낯선 말에 놀랐는지 아이를 돌아보더니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우스꽝스럽게 아이의 말을 따라했다. 아이 주변을 빙 둘러 돌아가며 몇 번씩이나 웃으며 흉내를 내는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유치원에서도 저런 놀림을 당하는 건 아닐까 문득 걱정이 되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행동을 한 아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놀림을 받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아이에게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주게 된다. 한참 웃고 떠들 나이인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조심스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모른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선에 태연하기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나마 나의 경우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방인인줄 모를 정도로 닮아 있으니 다행인 편이다. 자주 가는 집 근처 공원에서 희잡을 쓴 엄마와 딸을 본 적이 있다. 딸은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외모에서부터 이방인임을 숨길 수 없는 그들을 보며 그들의 삶은 또 얼마나 피곤할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용조용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희잡을 쓴 아랍 여성과 그 딸에게 향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종종 마주쳤던 이주민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쉽게 수군거리고 흘끔거리는 그 땅에서 어떤 마음으로 견디며 지내고 있을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이방인은 결국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이 아님에도 ‘너는 왜 나와 다르냐’는 소리 없는 질문들을 견디며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역시 너무 많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다. 내가 던진 시선에 이방인이 되어간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하다. 상상력이 부족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고야 그 마음이 비로소 생생하게 와 닿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편견을 버리고 다름을 그저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은 그러나 개개인의 인성에만 기대어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편견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눈이 치켜 올라간 동물은 사납다는 편견이 있어야 초원에서의 생활에서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발이 없는 파충류는 날카로운 이와 독을 갖고 있다는 편견이 있어야 뱀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편견은 인류 문명 역사 이전부터 생존을 위해 꾸준히 유전자를 통해 전달되어 온 진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견을 갖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오랫동안 교묘하게, 때로는 드러내놓고 대담하게 편견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해져 우리는 지금껏 숱한 이방인들을 만들어왔으며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을 극복해낼 수 있는 교육과 제도화된 시스템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역무원이 한 손에 널따란 판을 들고 플랫폼으로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열차가 멈추자 역무원은 들고 있던 판을 열린 열차문과 플랫폼 사이에 걸쳐 두었다. 덕분에 휠체어가 편히 내릴 수 있었다. 잘됐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여기서 휠체어가 내릴 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출발역에서 탑승을 도운 역무원이 도착역의 역무원에게 도착시간, 차량 번호, 도어 번호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버스에서도 유사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다. 한참 출발을 하지 않길래 뭘 하시는 건가 봤더니 휠체어가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휠체어나 그와 유사한 것들이 탈 때 필요한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정거장에 서 있는 휠체어를 본 기사님이 도착하자마자 내려 그것을 설치해 쉽게 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버스 뒷문으로 타면 바로 앞에 휠체어나 유모차 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역시 편리하다. 내릴 때에도 물론 기사님이 직접 버스에서 내려 하차를 도왔다. 버스 운행은 당연히 늦어졌지만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오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우리 사정을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몇 번씩이나 빠르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기사님을 보니 마음이 참 좋았다. 그런데 이런 것은 역무원이나 기사 개개인의 품성이나 덕에 의지해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는 교육과 메뉴얼화가 이루어낸 결과일 것이다. 배려나 도움으로써가 아닌 해야 할 당연한 일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편견이나 차별을 극복해가는 데 있어서 시스템의 구축은 이렇게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함께 이야기 나누고 나아갈 길을 공유하며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누구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야 한다.
다시 이방인으로 돌아가서, 나는 내가 꽤 단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몇몇의 판단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의 믿음쯤은 스스로에게 갖고 있다고 자신해왔다. 그런 나에 대한 자신이 실은 나를 사랑해주었던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져 왔었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홀로 선 인간은 예외 없이, 그리고 더없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방인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언제든 내몰릴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니 이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한다.
20여년이라는 다산의 발걸음이 고마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곁을 지켜주었다. 주눅 들고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여주었고,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에도 기죽지 않았고, 변화의 힘에 미래를 걸고 교육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이제는 우리가 갓 스무살을 넘긴 다산의 곁을 지켜주어야 할 차례이다.
스무 살은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인가? 스무 살의 우리는 얼마나 많이 부딪치고 좌절하고 깨닫고 일어났는가? 그때 우리와 함께 넘어지고 울고 위로하고 웃던 이들을 우리는 친구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좋은 친구 노릇을 해왔던 다산의 곁을 나는 지켜주고 싶다. 그럼으로 다산이 더욱 단단해지고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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