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썸 타는 불온한(?) 그녀
이번 몸살이 만난 벗바리는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에서 일하고 있는 송주현님입니다. 송주현벗바리는 다산인권센터 초기 상임활동가로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친정(?)같은 다산 이야기도 나누고, 근황도 궁금해 영등포에 위치한 사무실에 다녀왔습니다. 4층 사무실 옆 회의실. 붉은 바탕에 선명한 ‘총파업’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다소 불온해(?) 보이는 현수막을 배경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름휴가는 다녀오셨어요?
네. 2박3일은 사람들과 함께 계곡 트레킹 다녀왔고, 나머지 2박3일은 혼자 여행 다녀왔어요. 평소에 걷는 걸 좋아해서 산에 자주 가는 편이예요. 걷다보면 머릿속이 비워져 가벼워지거든요. 그래서인지 십자수나 비즈공예를 취미로 하기도 했어요. 단순한 것을 반복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져서 좋아요.
다산에서 상임 활동하셨다면서요?
1998년도에 당시 다산에서 일하고 있던 송원찬선배가(학교 선배라고 한다) 다산에서 송무업무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함께 하게 되었어요. 당시는 다산인권센터로 전환하기 전인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로 노동, 공안 관련 송무와 인권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었고, 저는 노동, 공안, 재개발, 재건축 등의 소송관련 업무를 2002년도까지 담당했어요.
당시 다산은 어떻게 기억되나요?
사실... 당시 제가 일을 너무 못해서 너무 많이 혼난 기억만 나요.(웃음) 송무업무가 낯설기도 하고 특히 재건축, 재개발 관련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다산에서 나와서 건설운송노조에서 일할 때 다산의 경험이 정말 큰 자산이 됐어요. 당시 노조가 돈이 없어서 변호사를 쓸 수가 없어서 소송 관련 업무를 제가 직접 했거든요.
다산의 인연, 노조상근으로 이어져
법무법인 다산과 함께 레미콘 노동자 관련 소송을 대리하고, 2000년도에는 건설운송노조 건설과 노조인정 싸움을 다산이 함께 하면서 건설운송과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2002년에 다산 상근을 그만두면서 다산에서의 인연으로 노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다산이 첫 일터는 아니시죠?
1992년도에 학교 졸업하고 텔레비전 브라운관 만드는 공장에 취업해서 일했어요. (이른바 학출(학생운동권출신공장노동자)의 위장취업 주인공이다) 뭐 엄청난 사명감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고, 당시는 그런 게 자연스럽고, 그냥 해야 할 것 같았어요.
힘들거나 후회되지 않았나요?
한번 결정하면 하는 스타일이라 별로 후회나 실망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지금 노조에서 정책위 일을 하고 있는데, 정책위는 현장의 문제점을 가공하고 필터링해서 정책화하는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현장을 알지 못하고 현장을 겪어보지 않고 정책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 오기 전에는 책으로, 문건으로 배우지만 막상 현실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저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공장 시절 뭐가 가장 기억에 남나요?
먹물 끼 빼는데 일 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스쳐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우려 적금도 붓고, 정착하려 노력했어요. 왜냐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진심을 알아차리거든요. 나중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가깝게 지냈죠. 그때 받은 선물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18금 도금 목걸이인데 가운데 덮개를 열면 그곳에 사진을 넣을 수 있는 거요. 그리고 ‘봉지쌀’이요. 월급이 당시 최저임금에 훨씬 미치지 않았겠죠. 그래서 ‘봉지쌀’을 사먹었어요. 삼양라면 봉지에 쌀을 담아 팔았거든요. 노동자의 삶, 낮은 임금 같은 것을 생활로 겪게 된 거죠.
사랑하지 않고 썸 타려 애쓴 20년
2003년부터 건설노조연맹에서 일하고 있어요. 중간에 민주노총에 3년 정도 다녀온 걸 포함해서 20년이더라구요. 아주 오래 있는 건 어느 조직이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경력이 오래되면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내가 노조를 내 맘대로 하고 싶을 때’가 생기거든요. 그럴 때면 ‘나는 상근자다.’, ‘나는 선출된 노조임원이 아니다.’를 떠올리며 나의 위치에 대해 스스로 돌아봐요. 그리고 주위 동료들에게 물어요. ‘내가 선을 넘고 있는지 아닌지?’ 그때 들었던 조언 중 하나가 노조랑 사랑하지 말고 썸을 타라고 말이었어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를 떠났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저 욕 안 먹으려 노력하는 정도입니다.
여행 곗돈 100만원을 쾌척(?)하셨다는데^^
친구들 모임에서 여행가자며 매달 1만원인가? 3만원인가를 모으고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갈 수 없게 된거죠. 그래서 그 돈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좋은데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고, 당시 제가 후원하는 곳 중 몇 군데를 추천했는데 그중 하나가 다산이었던거죠. 친구들이 다산에 후원하자고해서 한 거예요.
서른살 다산에게
꾀가 나거나 편법을 부리고 싶을 때, 나를 돌아보게 하는 두 명이 있습니다. 노조에서 일하던 초기, 당시 60대였던 노동자분이 노동조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가 노조를 알아가고, 자신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임금체불을 상담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하려 하는 모습을 보는 게 기억에 남아요. 휴게실에서 잠을 자다 새벽에 구사대가 들이닥쳐 팬티 바람에 두들겨 맞아도 그대로 노조에 남아서 활동하셨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요. 다른 하나는 2007년 집회 도중 한 분이 분신하셨어요. 제가 그 현장에 있었고, 결국 그분의 장례식을 함께 치렀어요. 나의 원동력이 무언지 스스로에 물어보면, ‘초심’인 것 같아요. 그때 가졌던 처음의 부채감이요.
멀리서 보는 다산은 ‘애 많이 쓰고 있다.’, ‘그냥 고맙다.’라는 마음입니다. 다산도 힘들 때가 많겠죠. 그럴 때면 처음의, 그때의 마음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그럼 종종 지금이 명쾌해지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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