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에게…"
[연속기고 ③] <또 하나의 약속> 이 실장에게 '양심'이 있다면
다산인권센터가 <또 하나의 약속> 영화 후기를 ① 신화와 황유미, 우리 어린 시절의 꿈 ② 내가 다니던 삼성과 <또 하나의 약속> ③ 진성전자 이 실장님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계실까요?라는 주제로 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나를 가장 울린 인물은 윤미의 아버지 상구 씨였지만,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캐릭터는 이 실장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윤미네 가족을 ‘그림자 마크’하던 당신, 거액을 제시하여 사건을 막으려던 당신, 윤미 동생을 바로 그 진성반도체에 입사시킨 당신의 모습이 진성반도체와 이름 비슷한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는 내 친구, 선후배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야 그럴 리 없었겠지만, 내 친구나 선후배 중 누군가는 당신이 등장하는 영화가 걸리는 스크린을 최소화하려고 지금도 남몰래 뛰어다니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세력을 미행하던가.
영화를 보면서 나는 진성반도체가 반드시 망해야 하는 기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계 정상급 글로벌 기업이라면서 행태는 지질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반도체 라인에서 백혈병을 비롯한 희한한 질병 환자들이 속출한 건 당신도 부인하지 않으시지요? 당신이나 당신 회사 주장대로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고 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장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이렇게 대응하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입니까? 작은 중소기업도 이런 일이 생기면 라인 세우고, 원인 규명하고, 대책 세우고, 그리고 나서야 재가동하는 거 아닙니까?
당신들은 인도 보팔 참사를 뭉개던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1984년 행태가 여전히 글로벌 모범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런 기업은 빨리 망할수록 나라 경제와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됩니다. 국내에서 공장 못해 먹겠다며 가난한 나라에 가서 더 몹쓸 짓을 하기 전에 빨리 망해야 대재앙을 예방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라던 당신의 대사를 여전히 진실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진성은 어떤지 모르지만, 삼성은 얼마 전까지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더군요. 아마 당신도 그렇게 일을 했겠지요. 윤미네 가족을 밤낮으로 옥죄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CJ 회장을 미행하던 삼성 기획실인지 비서실인지에 소속된 직원들도 그러했을 것이고, 대포폰까지 동원해서 노조 조직 세력을 밀착 감시했던 삼성 관련자들도 그랬을 테지요. 어쩌면 삼성의 일부 임직원(앞서 밝혔듯이 내 친구일지, 선후배일지 모르는)들은 <또 하나의 약속> 스크린 수를 줄이려고 지금도 휴일 없이 일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실장! 그런 일을 할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진성을 위한 일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믿으셨습니까? 판단중지하고 오직 국내 최고 대우와 두툼한 성공 보너스만을 생각하셨습니까? 윤미 아버지 상기 씨에게 택시 안에서 멱살을 잡힌 날엔 근사한 술집에 가서 한잔 하셨습니까? 세상 뭣 같다고 푸념하면서? 아니면 새로운 전의를 다지면서?
영화에서 상기 씨가 한 멍게 대사는 꽤 인상적이지요. 멍게도 원래 뇌가 있었지만, 한곳에 붙박여 살면서 뇌가 녹아 없어졌다는 대사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실장 당신 같은 이는 뇌가 없어진 게 아니지요. 뇌가 없는데 윤미 동생에 진성에 데려다 쓰는 잔꾀를 어찌 내겠습니까. 진성이 내세운 변호사는 또 어떻고요. 인간에게서 녹아 없어지는 게 있다면 그건 양심일 겁니다. 지구의 생물 종 가운데 양심을 가진 종은 인간이 유일하고, 그게 녹아 없어지기도 하는 종 또한 당연히 인간이 유일하지요.
흥미롭게도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양심이 그래도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대놓고 양심 자랑하면 ‘루저’처럼 비치는 세상인지라 윤리니 도적이니 케케묵은 얘기는 피합니다만,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아직은 수오지심이란 게 살아있다고 봐야겠지요. 양심이 있다면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진성반도체에 분개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이 실장 당신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관객석에 앉아서 당신 모습과 윤미와 윤미 아버지와 노무사와 고통받는 진성 가족의 드라마를 본다면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 또한 나처럼 눈물이 날 걸요.
문제는 영화를 볼 때와 삼성에서 일할 때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저도 삼성이 자리 잡은 수원시민인지라 이런저런 삼성 얘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삼성 재직자들은 삼성 욕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 하나는 삼성에서 잘렸는데도 삼성을 비난하지 않더군요. 아주 드물게 삼성 퇴직자 가운데 매우 비판적인 이들을 볼 수 있지요. 제가 사는 수원에서 행세깨나 하는 분들도 삼성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삼성반도체에서 난치성 질병이 200명 이상 발생하고, 80명이 숨지기까지 이를 제대로 알린 지역 언론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지방 언론사에 재직할 때 삼성에 비판적인 글을 쓰려면 사나흘은 족히 있는 용기 없는 용기 그러모아야 했습니다.)
삼성은 이제 공룡입니다.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게는 20%, 많게는 35%에 이른다는 보도가 지난달에 있었지요. 쉽게 말해 삼성이 흥청거리면 대한민국이 흥청거리고, 삼성이 휘청거리면 대한민국이 휘청거린다는 얘긴데, 겁이 더럭 납니다. 어제도 몇 사람이 한담을 하다가 삼성이 몇 년 안에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성은 망해도 싸지만, 삼성이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삼성이 망하면 내 친구, 선후배들, 이웃들 당장 큰일 아닙니까. 대한민국 경제는 고사하고 수원 경제는 아주 작살이 나겠지요. 하여, 삼성이 망하지 않는 길을 나 혼자 고민해본 적도 있습니다. 답은 간단하지 않을까요? 매출과 수출에서만 글로벌이 아니라, 노동에서, 환경에서, 안전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켜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짜 삼성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되도록 따끔하게 비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아픔쯤이야 삼성 측이 먼저 보듬는 게 세계 초일류 기업의 자세라고 저는 믿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진성 분에게 삼성 얘기만 잔뜩 늘어놓아서. 하여튼, 진성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경쟁이 하도 살벌해서 40대 초반이면 이미 임원 승진할 사람, 못할 사람이 가려진다면서요? 영화로 보니 이 실장도 해당 나이로 보이던데,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조심하십시오. 평생을 바치고도 팽 당하지 않게 말입니다. 삼성을 아낀다면 삼성을 호되게 나무라야 하듯이, 당신도 진성을 좀 더 냉철하게 보기를 권합니다. 당신이 본질이라고 믿는 경제의 우상 앞에 양심을 바쳐버리고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 스스로 한 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마치 삼성 다니는 나의 후배 같아서 드리는 고언입니다. 그리하여 깨달아지는 바가 있다면 소주 한 병 들고 울산바위가 바라보이는 곳에 한 번 가보시지요. 연락 주시면 동행해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양훈도 경기민언련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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