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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칼럼

[또하나의약속]삼성전자를 그만뒀다. 집에 경찰이 왔다

다산인권센터가 <또 하나의 약속> 영화 후기를 ① 신화와 황유미, 우리 어린 시절의 꿈 ② 내가 다니던 삼성과 <또 하나의 약속> ③ 진성전자 이 실장님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계실까요?라는 주제로 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지난주 아내와 함께 <또 하나의 약속>을 보았다. 오후 시간대였지만 제법 많이 이들이 영화를 보러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아내에게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먹먹했던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글을 적는다.

 

일자리의 탄생

 

05160258. 나의 사번이다, 그들이 나에게 부여한 숫자, 곧 나의 모습이다. 25살이었던 2005년 12월 나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디스플레이 사업부 제조그룹에 입사했다. LCD, PDP 등 대형 TV를 생산하는 공정에 투입되었다. 당시 40명의 입사 동기들 또한 메인 조립 공정과 PBA 공정으로 분산 투입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숫자가 발견된다. 입사 동기 40명. 삼성전자에서 고작 40명밖에 뽑지 않는다면 놀랄 수도 있겠다. 당시는 협력업체 00산업이 파견한 인력들이 계약 해지돼 철수하는 시점이었다. 삼성전자는 그들의 빈자리를 신입 사원으로 채웠다. 다른 이의 일자리를 빼앗고 나의 일자리를 만든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지는 곳이었다.

 

건강은 스스로 챙기는 것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고(故) 황유미 양은 '특별한 경우'여서 병에 걸렸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회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한 것인가 되묻고 싶다. 나와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은 혈뇨, 생리불순, 두통, 수면 장애, 근골결계 질환 등을 겪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단순한 질병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노동량의 한계와 소통 문제가 있었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제조업의 특성상 하지정맥류, 근골격계 질환을 겪으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직원들은 교대 근무, 특근, 잔업의 피로로 생체 리듬이 깨져 생리 불순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는 그 원인을 개인에게 돌렸다. 이런 방식의 조직 관리 형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노동량이 주어진다면, 내부 조직과 소통해 인력을 재배치하거나 근무 형태를 조정해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프레시안(이진경)

ⓒ프레시안(이진경)

 

더구나 <또 하나의 약속>이 조명한 것처럼 삼성전자는 치열한 내부 경쟁 구도를 통해 아파도 누구 하나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구조를 암묵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일을 해도 개인이 느끼는 피로도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조직 내에서는 표준화된 기준을 제시하고 역할 수행에 따른 고과 평가를 진행했다. 그것이 조직 내부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내가 일하던 공정인 SMT, PBA 공정에서는 납이 필수 요소로 사용됐다. 나는 전자기판 위에 납을 도포하고 그 위에 전자 부품을 얹어 오븐에 굽는 일을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사용되는 납이다. 중금속인 납은 일반적으로 인체에 흡입되었을 때 중추신경계를 마비시킨다. 인두 작업이나 납조를 하면 접착 물질, 봉합 물질 그리고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한 입자들이 생긴다. 특히, 로진(rosin : 송진가루가 원료인 첨가제)이 들어 있는 용제(flux)를 사용하여 납땜을 하면 천식이나 호흡기 자극을 일으킬 수 있다. 피부에 접촉하면 발진 같은 피부염이 생기기도 한다. 영국 건강 안전 위원회(UK's Health & Safety Executive), 미국 직업 안전 건강 관리국(OSHA)에서 "로진을 포함한 연기는 기관지염, 현기증, 두통을 일으킨다"라고 밝혔다. 환경 규제로 지금은 무연납을 사용하고 있지만, 과연 무연납이라고 안전할지 의구심이 든다.

 

안전 복장을 착용하고 작업하면 안전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내가 근무한 작업장에 약 40명이 근무했지만 안전 마스크는 4개에 불과했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우주복 같은 작업복은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전기나 미세 먼지 등으로부터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었다. 노동자들은 생산 현장에서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 안전 교육도 허술했다. 형식적으로 A4 용지 서너 장짜리 '환경 안전 교육'이라는 문서를 나눠주는 것이 정말 노동자들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사실 나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사업장 앞에서 열린 많은 집회들을 보았다. 회사에 문제 제기를 했다고 해고된 박종태 대리 사건, 고(故) 황유미 양 사건 등…. 이런저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사내 네트워크인 싱글엔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내세우는 글들이 올라왔다. (관련 기사 : "삼성전자에 노조를!"…박종태 대리, 해고 확정해고, 자살, 협박…대한민국 일류 기업의 그늘을 밝혀라!)

 

▲ 지난 2011년 3월 6일 고 황유미 씨의 4주기 당시 삼성전자 본관 진입을 시도했던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제지당하던 모습. ⓒ프레시안(김봉규)

▲ 지난 2011년 3월 6일 고 황유미 씨의 4주기 당시 삼성전자 본관 진입을 시도했던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제지당하던 모습. ⓒ프레시안(김봉규)

 

각 부서장들은 직원들 단속에 나섰다.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네 일이나 열심히 해.", "그 사람들에게 연락 오면 즉시 부서장에게 알리세요.", "그분 장례식은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 그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조심들 하세요.", "외부에서 얘기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동요되지 않도록 내부 교육 진행하세요." 막힌 귀와 수많은 눈으로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었다.

 

▲ 삼성전자 사내 게시판에 '노조를 만들자'는 글을 올린 뒤 해고당한 박종태 씨.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전자 사내 게시판에 '노조를 만들자'는 글을 올린 뒤 해고당한 박종태 씨. ⓒ프레시안(최형락)

 

나는 떠났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25살 꿈으로 가득 찼던 청년은 30대가 되어 가정도 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기반도 잡았다. 퇴근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김치찌개 안주로 소주 한잔 기울였다. 월급날인 21일이면 즐겁게 아내와 함께 외식도 했다. 연말 성과급이 나오면 여행 다니고, 여유 자금은 저축도 했다. 집안의 대소사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뿌듯했다. 어찌 보면 참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정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그저 그냥 살아갈 수 있는 구조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개인으로써의 삶과 자유가 철저히 관리되고 규제되는 내부의 운영 형태에도 어느 정도 길들여졌었다.

 

그러다 2013년 봄에 나는 선택했다. 더 이상은 그들의 기계 부품 한 조각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등을 돌렸다. 삼성전자는 분명히 큰 회사이다. 하지만 좋은 회사는 아닌 것 같다. 노동자들의 선택을 최소화하고 기업 이익을 최고로 추구한다. 노동자들에게 연봉 5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지급하면서 삼성전자를 위해 힘을 모을 것을 당부한다. 성과급 또한 그룹별, 사업부별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번 씩 질문한다. '나의 노동은 당신의 노동보다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요?' 지금도 친구와 선후배들은 여전한 경쟁 구도 속에 근무하고 있다. 그들의 안녕이 걱정되는 오후다. 

 

새로운 삶을 위해 퇴사 의사를 제시한 다음날, 7년 만에 처음 결근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생각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오전 9시 내가 사는 동네에 난리가 났다. 경찰관 2명 소방관 2명, 회사 관리인 1명이 우리 집 대문을 공구로 열려고 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알고 대문에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소란에 나가 본 나는 마치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소식을 들은 아내는 회사에서 걱정돼서 온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했지만, 7년간 그들과 한 소통을 생각해 볼 때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사직을 표했을 때는 '다산인권센터'를 알게 된 시점이었다. 회사가 고작 결근으로 경찰까지 부른 이유는 직장 동료인 내가 걱정됐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부에서 발생할 문제들(내부 부조리 적발로 인한 자살, 인사이동 등)이 외부로 누설될 것을 두려워한 사전 조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구심이 들도록 삼성, 내가 한때 꿈과 땀을 바친 그곳은 그랬다. 관리의 삼성이라고 하니까.

 

그들에게

 

회사를 그만둔 지금, <또 하나의 약속>의 황유미 양과 아버지,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힘들게 싸워온 것일까? 산재 인정? 보험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사람의 아버지, 어머니, 가족으로서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회사의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 싶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윤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에도 아직 양심과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故 황유미 양과 아버지,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프레시안(최형락)

▲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프레시안(최형락)

 

벗바리 한량바코 씨는…

 

2005년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 제조그룹 입사
2013년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 제조그룹 퇴사
지금은 행궁동에서 행궁청년회 회원과 공정 여행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