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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구)웹진_<다산인권>

반빈곤 아카데미 후기 _ 염소

경기복지시민연대와 다산인권센터가 공동주최한 지역 반빈곤 아카데미 <빈곤아, 덤벼라!>가 잘 마무리 됐습니다. 총 4번의 강좌를 통해서 빈곤의 원인과 앞으로 지역에서 반빈곤 활동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염소님께서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반빈곤 포럼에 참석하여 뒷풀이에서 술을 몇 잔 먹고, 눈치 없이 늦게까지 따라다니며 술추렴을 했더니 아직도 속이 쓰리고 미식거린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에는 이 정도 아니 이 보다 더 진탕하게 마셔되었어도 끄덕없이 다음날 아침이면 새로 시작할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하다. 의지력이나, 선한 마음으로 몸의 노쇠화를 막을수는 없다. 빈곤이 단지 개인의 의지력이나, 노력의 문제라면 사실 빈곤이란 단어는 선택(?)일 수 있다.  빈곤이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작동하는 괴물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사회라는 접두사를 붙여야 한다.

<반빈곤 아카데미>는 4번의 강연으로 준비된 걸로 알고 있는데, 난 두 번(마지막 두번)밖에 참석하지 못했다. 25일은 한겨레두레 생협 발기인 대회가 있었고 원래 계획은 거기에 참삭코저 하였으나, 가는 도중에 빈곤포럼으로  바꿔탔다. 생협 발기인 대회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하는게 갑자기 번거로워 졌다. 해서 나의 빈곤 포럼 참가는 우연이었다. 모든 일들이 그런거처럼.
그런데 갑자기 빈곤포럼에 참가하게 된 이유가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상조 생협은 월 3만원을 지불하므로.화폐의 양으로만 보자면 더 중요한 모임이 되어야 하지만, 죽음은 먼 미래의 일이고 빈곤은 현재의 일이라는 생각이 내 발걸음을 돌린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3강은 나눔과 미래 사무국장인 이주원씨가 해주셨다. 이분은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주거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주거 운동에 있어서도 열의를 다 보이신 것같다. 많은 경험을 한 사람답게 현실의 주거 문제를 많은 실례를 들어주셨고, 현재 우리의 주거 문제에 대한 실재적인 사실들을 들을 수 있었음이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가감없이 주거 빈곤을 아주 현실적으로 접근한 점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문제 해결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 점은 나 같이 주거빈곤에 대한 문제만 나올때마다 먼저 분노부터 하는 얼치기에겐 아주 유용한 강의였음을 인정치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보았을때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언제나 해결 방안이 시장이라는 상황을 인정하는 선에서만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입장이고, 신뢰할 만한 생각도 아니긴하지만.

4강은 대구반빈곤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인 서창호씨가 맡아주셨다. 대구에서 오랫동안(4년정도) 반빈곤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이런 오랜 노력을 한 사람들은 빈곤문제를 단지 서류상으로만 논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생생함과 고뇌가 보인다. 뒤에 네트워크란 이름이 붙어서 그렇지만, 빈곤운동이 얼마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지, 각 주체들 사이에 의견 조정이 얼마나 힘이드는지, 아직은 초창기라 반빈곤운동이 얼마나 취약한 배경하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점을 감사드리고 싶다. '복지'라는 좀 더 고급스런 용어의 근방이 아니라 적나라한 '빈곤'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반빈곤운동의 지난함을 가슴 아프게 대할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직은 초창기라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이런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치기를 떠는 나 같은 엉터리 회의주의자는 입 닥쳐야 할 듯하다.
 
1강과 2강을 내가 듣지를 못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빈곤이란 단어는 사회의 어떤 현상을 개념화한 용어이지만, 언제나 그런것처럼 사람의 문제이다. 빈곤게급, 빈곤층의 문제이다.사실은 이 말도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빈곤층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이다. 빈곤층의 문제라고 하면 빈곤층이 문제 있는 것같은 뉘앙스를 풍길 우려가 있기 대문이다. '빈곤'이란 말은 아름다운 말도 아니고, 더구나 드러내놓고 '내가 빈곤하다'하고 말을 하기가 어렵다. 누구나가 자기가 빈곤하지를 않기를 바라고, 설령 통계상으로 분명 빈곤층에 포함 될지언정 죽어도 나는 빈곤층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고 그렇게 믿고 싶을 게 당연하다.개인도 마찬가지지만 사회도 자기 사회에 많은 빈곤층이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비가시적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가시적영역을 가시적 영역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빈곤을 드러내고 빈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한다. 지금은 그럴때이고 또 그래야만이 빈곤해결의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싶다. 다른 점은 다 제쳐놓더라도 이번 포럼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고 믿고 싶다.
 
수유너머의 고병권이 장애인단체에서 루쉰의 희망에 대해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어떤 장애 아들을 가진 부모가 '희망'에 대해 강의한다닌까 큰 기대를 가지고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루쉰이라는 사람이 '희망은 허망하다' 뭐 이딴식의 애기를 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고 그 부모가 실망하여 서럽게 울엇다고 하는 일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어찌 울지 않았겠는가. 희망이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끝날 것같지도 않는, 불빛 한점 없는 긴 터널을 걸어야한다는 게 얼마나 절망이었겠는가?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탈빈곤의 비법이나 연금술은 없다. 희망도 없다. 단지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나는 빈곤하다'

■ 염소님은 다산인권센터 벗바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