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덕분에 윤석열 탄핵 시위에 나갈 수 있었어요.”
이번 벗바리 인터뷰에서는 오랜 시간 다산을 후원해주신 벗바리이자 작년 인권 기행과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여하신 임춘희 님을 만났습니다.
Q.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임춘희라고 합니다. 예전에 수원여성의전화(이하 ‘수여전’)에서 활동했었고, 그 이후에 수원시에서 통합사례관리사로 일하면서 복지 사각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작년에 정년퇴직을 했구요.
Q. 수여전에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일하게 되셨나요?
A. 제가 수여전에서 일한 게 2007년 6월부터인데요, 당시 수여전 이사님이자 같은 교회 집사님이셨던 분이 수여전에서 일자리 창출팀을 모집하는데 한 번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해 주셨어요. 그때 마침 자영업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쉬는 중이었거든요. '그럼 내가 한번 해보겠다' 이렇게 해서 지원을 했고 다행히 합격을 했어요. 그래서 성교육과 다문화 학교 운영하는 일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거기에서의 일이 너무 재미있고 일하면서 교육도 받을 수 있는 게 정말 좋더라구요. 그래서 일자리 창출팀이 끝나고 나서도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수여전에서 상담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Q. 수여전에서 활동하실 때 어떤 게 그렇게 재밌었나요?
A. 살면서 그때까지 접하지 못했던 여성 인권에 대해 눈을 조금씩 뜨게 된 점이 충격적이면서도 재밌었어요. 또 단체 내에서 활동가들끼리 자체적으로 스터디도 하고. 그런 것들이 제 삶에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죠.
그 당시에 제 결혼 생활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편이었고,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눌려 있었던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오히려 결혼 전에는 훨씬 더 자유분방하게 살았는데 결혼하면서 그런 걸 다 누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수여전에서 활동을 하고 교육을 받다 보니 나랑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걸 다시 찾은 느낌이랄까? 그런 게 너무 재밌었어요.
Q. 수여전에서 활동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건가요?
A. 제가 2015년 8월까지 8년 2개월을 활동했어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일 중의 하나는 여가부와 국가인권위 앞에 가서 기자회견 겸 퍼포먼스를 했던 거예요. 제가 다문화 학교 운영팀에서 일할 때였는데, 국가에서 국적 취득하는 시험을 더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려고 했었어요. 그 법이 통과되면 결혼 이주 여성이 국적을 따게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사정상 시험공부를 할 시간이 안 되는 사람이 정말 많거든요. 이주여성 입장에서는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면 사는 데 어려움이 너무 많은데 국가가 그것을 빌미로 붙잡고 시험을 더 강화한다고 하니까 활동가 입장에서는 화가 났죠. 그래서 그런 내용을 짧은 연극으로 만들어 길바닥에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게 참 기억에 많이 남아요. 또 세월호 참사 이후에 특별법 제정 촉구하면서 1박 2일로 서울까지 걸어 갔던 일도 잊지 못할 일 중에 하나에요. 여성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활동한 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Q. 수여전 활동을 그만두고 바로 이어서 수원시에서 통합사례관리사로 일하셨잖아요. 거기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A.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사례관리 대상자로 삼아서 그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각종 자원이나 필요한 것을 연결해 주는 업무를 했어요. 원래 보건복지부가 지원하고 수원시가 예산을 따로 들여서 당시에 약 30명 정도의 통합사례관리사를 뽑았어요. 이 일이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까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두신 분들도 많고 그래서 지금은 20여 명 정도로 줄었는데, 제가 그중에서 정년퇴직을 한 첫 번째 사례예요. 8년 좀 넘게 일했는데, 한 400여 명 관리한 것 같아요.
Q. 400명 정도를 관리하셨으면 정말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을 것 같아요.
A. 좀 전에도 말했지만 거기서 만나는 분들은 정말 여러 가지로 힘든 분들이시거든요. 복지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이라고 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수급도 못 받고, 정말 사정이 안 좋은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사례관리 대상자가 되는데, 저희가 하는 일은 이 분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구직을 해서 자립을 하실 수 있도록 다양한 도움을 드리는 거예요.
별별 사연을 가진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나마 저희의 개입으로 자립을 하고 좋은 방향으로 삶을 꾸려나가신 분들도 계셨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좀처럼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사례도 종종 있었어요. 정신질환 문제, 중·장년의 독거문제, 가정폭력 문제처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구요. 다행히 여성의전화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그 분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좀 더 넓은 관점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어요.
Q. 작년에 다산에서 하는 인권기행에도 같이 가시고, 다산이 하는 일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잖아요. 원래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면은 수여전의 활동을 통해서 이쪽으로 조금 더 관심을 가지시게 된 거예요?
A. 아무래도 여전에서 많이 배웠죠. 근데 저도 원래 결혼하기 전까지 진보 성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전 젊었을 때 결혼 생각도 없었거든요. 결혼제도에 대해 불만도 많았고. 20대 중반에 보육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내 인생을 여기다 묻겠다’고 결심했었어요. 사회봉사에 대한 꿈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건강상 문제가 생겨서 일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다시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죠. 나중에 건강이 괜찮아지면 다시 와야지 했었는데 당시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만약에 보육원에 계속 있었다면 아마 결혼은 안 했을 거예요.
Q. 과거에서 현재의 이야기로 좀 넘어가 볼게요. 12월 3일 계엄 선언 때 선생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A. 그때 컴퓨터를 하고 있었는데, 딸이 문자로 ‘엄마 계엄 선포했어요’ 그러더라구요. 바로 TV를 틀었고, 이틀 정도 밤을 새운 건 같아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전시(戰時) 상황처럼 느껴졌거든요. 윤석열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일을 벌인 건지 이해도 되지 않았구요.
Q. 12월 14일 탄핵 시위에 다산 활동가 그리고 다른 벗바리들과 함께 가셨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시위에 참여하셨나요? 그리고 그 날 탄핵이 가결되기도 했는데 그날의 경험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A. 상황을 지켜보면서 탄핵 시위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7일에 가결이 안 됐잖아요. 그러다보니 좀 더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라도 가야겠다' 좀 더 많은 시민이 동참할 때 바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생각에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때 거기 같이 모인 사람들하고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면서 으쌰으쌰 하니까 재밌기도 하고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들고 온 응원봉 불빛의 물결도 정말 아름다웠구요. 저는 예전에 조용필 콘서트 갔을 때 썼던 응원봉을 가져갔답니다.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됐을 때 제가 뭔가 그 일에 일조했다는 거에 보람을 느꼈어요. 그 현장에 다산 활동가들 그리고 다른 벗바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다들 마음은 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 간 사람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아마 저 혼자였으면 가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다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묻어서 같이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나이 들어서는 혼자 참여한다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함께 가자고 먼저 손 내밀어 준 다산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탄핵 이후에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많이 바뀌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수여전 그리고 통합사례관리사로 일했던 경험과 선생님 개인적인 삶을 쭉 돌아봤을 때, ‘탄핵 이후에 우리나라 우리 사회가 이거 하나만큼은 꼭 바뀌었으면 한다’라고 생각하시는 게 있을까요?
A. 우선 탄핵이 잘 해결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안정이 될테니까요. 그걸 전제로 했을 때, 저는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진 정치인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구요. 제가 자기소개서를 쓸 때 항상 넣는 내용이 있어요. 내 삶의 가치는 여성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있다. 자소서에 그런 말을 쓰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그 말을 반복하면서 저 스스로 계속 인식하려고 하는 것도 있거든요. 부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활동 > 웹 소식지 몸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웹 소식지 몸살 24호_겨울] 살림살이 & 벗바리(후원자) (0) | 2025.01.22 |
---|---|
[웹 소식지 몸살 24호_겨울] 다산 활동가들의 TMI (0) | 2025.01.20 |
[웹 소식지 몸살 24호_겨울] 다산의 활동소식 (0) | 2025.01.20 |
[웹 소식지 몸살 24호_ 겨울] 콕!! 집어 인권 (0) | 2025.01.20 |
[웹 소식지 몸살 23호_2024년 가을] 의료대란과 엄마의 밥 외 (0) | 2024.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