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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입장•성명

세월호 참사 1년…'무능한 배후 조정자'로 그들과 보낸 1년

제대로 된 배후가 될 수는 없을까

여름이었겠다. 유가족들이 청운동에서 농성할 때 일이다. 청운동사무소 앞은 세상 온갖 요구가 모인다. 경찰이 청와대까지 못 가도록 막는다. 그래서 집단행동이 가능한 길 끝이 청운동사무소다. 찾아오는 이들은 다양하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넓다. 신문고 치는 사람들처럼 규탄하기 위해 오고 청원하러 오기도 한다. 경찰들 움직임이 분주해지면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집회가 있는가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런 어떤 모임이었으리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단체의 기자회견이 끝난 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청운동 앞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 앞을 우루루 지나치고 있었다. 그 중 중년 여성이 다영엄마와 함께 앉아있는 내게 물었다. “세월호 때문에 계신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래 이건 정말 제대로 해결해야지. 그런데 배후조정 세력들이 문제야. 그런 사람들만 없으면 우리도 다 찬성이야…힘내요.”이러면서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갔다. 함께 있던 다영엄마는 옆구리를 쿡 찌르며 “배후조정이나 제대로 하면서 욕을 먹어. 맨날… 제대로 못하면서 왜 욕만 먹는거야”했고, 무능한 배후조정자와 배후조정 당하는 유가족은 뙤약볕 밑에서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배후조정도 못한 채 4월 16일을 앞두고 있다.

▲ 지난해 8월 23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기소권 및 수사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 당시의 모습. 유가족 격려방문을 하려던 시민을 막기 위한 경찰차벽이 세워져 있다. (사진=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세월호 ‘국대위’ 1년

‘국대위’라고 불린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의 줄임말은 ‘국대위’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국민대책위원회 줄임말이라 생각하셨던 것이다. 위원회가 아니라 회의라서 ‘국대위’가 아니라 말씀드렸더니 그냥 ‘국대’라고 불렀다. 왠지 모르게 묘한 뉘앙스… 마치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배후조정자’의 줄임말처럼 느껴진다. 마음 탓인가. 자격지심일수도 있겠다. 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중 하나로 초기부터 참여했고 마이크도 많이 잡았다. 커다란 슬픔 뒤에 몰려온 거센 분노, 그보다 더 가파른 급물살로 몰아쳤던 사건과 사람들.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모두, 아니 적어도 나는 진짜 ‘무능한 배후세력’이었다.

‘패 죽이고’ 싶도록 미운 정부는 몇 날 밤을 새우고, 몇 날 낮을 싸워도 끄떡하지 않았다. 정말 미안했다. “이렇게 싸우는데도 왜 끝이 보이지 않냐”고 묻는 유가족들 앞에서 늘 미안했다. 단식 농성, 노숙 농성, 기자회견, 집회, 도보행진, 삼보 일배, 속옷까지 젖는 빗속에서 버티는 온갖 종류의 저항이 이어졌다. 그토록 목매어 외쳤던 수사권, 기소권 있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까지 좌절되는 동안, 괴로웠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들 앞에 왜소하기 짝이 없는 운동이 미안했다. 특별법이 통과되고 청운동 농성장을 접고, 전국에서 국민간담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민간담회에 가족들과 함께 다녔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백미터 달리기를 했다면, 이제 우리는 마라톤 구간에 들어섰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미완의 완성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계속 같이 하자.”라고 말했다. 그런 어느 날 어느 곳 간담회였는가. 겨울로 들어서던 초입, 허겁지겁 늦게 자리에 앉으니 영만엄마가 손을 잡아주었다. 지나치게 따뜻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느라고 말하지 못했다

설명을 해야 하는데 우느라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늘 강단진 최성호엄마도 그날은 그랬다. 며칠 전 생존학생 한명이 자해했던 소식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살아 내야할 날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엄마들도 울었고 참석한 사람들도 울었다. 아마 그날은 쌓였던 슬픔이 쏟아진 날이었나 보다. 다영엄마가 꽤 오래전에 “너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중얼거리던 말을 들었을 때, 그날 이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느 날은 성호, 어느 날은 다영이, 어느 날은 영석이, 어느 날은 순범이가 자는 내 귀에 무슨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은 “내가 엄마 아빠한테 잘할게. 염려말아…”라고 이야기해야 남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너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만으로도 힘겨운 이들에게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안전한 사회를 위한 어떠한 약속도 할 수 없는 사회였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고 오늘도 그들은 광화문에서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다시 노숙을 하고 있다. 입대영장 받아 놓고 세월호 아르바이트 생으로 승선한지 하루 만에 참변을 당한 현수아빠도 광화문에서 농성중이다. “군대 간다던 놈이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 떠나, 이렇게 돌아오지를 않네요…광화문은 온통 경찰뿐입니다.” 청와대로 가겠다던 최성호아빠는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사지가 들려 경찰서에 끌려갔다. “나는 죄지은 거 없으니, 여기 있다 나갈께요. 걱정하지 말아요.”오늘도 그들에게 이곳은 세월호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다. ‘나라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그만 좀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라는 없다. 희생자들과 남아있는 이들을 참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불러 세우고 있다. 온 국민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은 정부 시행령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될 참이다. 이 나라 정부는 참사 진상을 밝힐 의지가 눈꼽만큼도 없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 생각도 없다. 아직도 없어진 대통령의 7시간,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그토록 위험한 배를 바다위에 띄웠는지 숨기고 싶을 뿐이다. 지키고 싶은 것은 자신들 권력밖에 없다.

1년을 기록하는 내 마음

구조에 참여했던 잠수사들 뼈는 잠수병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지원할 법은 없다. 현수와 함께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살아나온 현수친구 둘은 입대했다. 온 국민이 세월호를 바라본 것만으로 슬픔에 젖어있던 때, 그들은 군대에 들어갔다. 트라우마 치료는 그들에게 언감생심이다. 살아난 것만으로 죄인이 된 어른 생존자 민철씨는 세월호에서 빠져나온 날 어선을 타고 인근 섬으로 갔다. 주민들은 그의 젖은 몸을 이불로 덮어주고 뜨거운 차를 쥐어주었다. 참사 당한 이후 받은 가장 따뜻한 마지막 지원이었다.

▲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지난해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진상규명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명운을 걸겠다고 약속했다. (사진=YTN뉴스 캡처)

           
자비로 119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이들, 군대 간 아들 것까지 알뜰하게 차감하고 지워준 알량한 긴급복지 지원금, 끊임없이 “당신은 가난한가”를 묻고도 매번 각기 다른 부서와 담당 공무원에게 같은 서류를 제출하고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겨우 적선하듯 던져진 생계비.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게 ‘보상금 많이 받은 몰염치한 피해자’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교복입은 학생들만 지나가도 다리가 떨려 주저앉아야하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세월호는 끝나지 않은 참사다. 생존학생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어떤가. 있지도 않은 대학특례,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설과 비하가 난무하다. 비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어떤가. 효도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다는 아픔은 제대로 공명되었는가. 세월호 참사 1년 동안 만난 그들은 아프다. 그 많은 아픔의 비망록을 써 내야하는 순간, 그들 곁에 있었던 자원봉사자들과 시민들, 조력자들도 아프다. 무능한 배후조정자 ‘국대위’도 아프다.

치유를 위한 새로운 길

참사 1년을 맞아, 언론사들의 폭주하는 전화를 받고 있다. 그들은 아이템 전쟁 중이다. 새로운 기사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남아있는 이들을 위해 성실히 응대하지만, 사실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맞이하는 1년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난 1년 동안 구조뿐만 아니라 참사 대응에도 총체적으로 실패한 정부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정부를 쉽게 용서하고 희생자들을 오해하고 혐오하는 모습도 보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장성요양병원, 고양터미널, 판교환풍구, 오룡호 참사가 이어졌다. 쉬운 용서는 잇따른 재난을 초대했다. 우리 눈앞에는 개인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싱크홀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오늘 다시금 거리에 나선 세월호 유가족들. 참사 1년…어떠한 희망 메시지도 없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폭탄테러 등 위기 개입팀을 지원한 국제적인 트라우마 전문가 게오르크 피퍼가 쓴 <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슬픔을 당했다면 능동적인 애도 과정을 긍정적으로 치유적인 것으로 보라! 능동적인 애도란 울고, 생각하고, 절망하고, 추억을 떠올리고,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적인 애도는 고인과 함께 보내도록 허락받았던 시간에 대한 깊은 감사로 이어진다. 지인이 슬픔을 당했다면 그를 찾아가 상실을 극복하도록 돕고 지지하라!


우리는 지금 치유를 위한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함께 슬퍼하고 애도하며 그들이 상실을 극복하도록 돕고 지지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올 참사를 막기 위한 스스로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아직도 9명의 실종자가 바다에 있으며 진실을 인양하는 길은 가깝지 않다. 깊이 울며 함께 걷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 도와야할 이들이 거리에 있다. 그들 곁에 가자.


2015. 3. 31. 미디어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지금 인권하고 계세요] 그들은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다시 노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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