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에바다 학교, 계란으로 바위 깬 사연
[기고] 권오일 교장을 만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법무법인 다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다. 평택 에바다 농아원생들이 다산을 향해 오물을 날렸다. 돌도 날렸던 것 같다. 에바다 학교는 청각장애인이 모여 있는 농아학교였다. 비리재단 피해자인 장애인이 재단을 비호하는 상황, 소리 없는 그들의 눈빛이 만만치 않았다. 쉽게 끝날 싸움 같지 않았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된 지 6년째라고 했다. 그 후로도 1년간 싸움은 계속되었고, 2003년에서야 에바다는 정상화됐다. 싸움의 중심에 섰던 권오일 선생님을 10년 만에 만났다. 그는 현재 에바다 학교 교장이다.
인터넷에서 '에바다 학교'를 찾아보면 농아인 탁구 국가대표를 배출한 학교, 모범적인 장애인 학교로 나온다. 한때 '장애인 교육비리 재단' '에바다 사태'라는 오명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던 에바다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권오일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싸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거다.
"96년 11월 27일 새벽 5시 농아원생 26명이 농성을 시작했어요. 5분 만에 경찰들이 출동해 전원 연행해 가는데 경찰이 학생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세 명이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전쟁 상황이었죠."
농아원생 70여 명을 미국으로 돈 받고 팔고, 이름 바꿔치기해서 시청으로부터 이중 지원받고, 학교 옆에 있는 제본공장에 새벽까지 강제 노동시키고,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는 극한의 인권유린 속에서 농아원생들의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당시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기숙사 입구 문이 부서져 있고 교실 여기저기선 아이들이 울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인데 학교에서는 이번 일에 나서는 교사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학생부장이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죠. 교사가 21명이었는데 두 시간 격론 끝에 11명의 교사가 결의했어요. 파면, 해임 아니 이 정도 비리라면 경찰, 관청 할 것 없이 모두 연관돼 있으니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 하지만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사는 것 보다 낫다, 법정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살자. 그건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교사로서의 양심,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이렇게 11명의 교사가 모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2개월, 길어도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싸움은 장장 7년에 걸쳐 진행됐다. 교사와 원생은 둘로 쪼개졌다. 재단 쪽과 반대 쪽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제자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머리끄덩이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이쪽 아이들이 저쪽 아이들로부터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기도 했다. 급기야 허위 사실로 고소 고발이 남발되는 상황으로 확대되면서 에바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무렵 <경인일보> 노영란 기자가 주한미군의 에바다 학생 성추행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보도하면서 에바다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사건 초기부터 다산인권센터의 김칠준 변호사, 박진 간사, 송원찬 소장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기자가 파헤치고 인권 활동가들이 뛰고 변호사가 법률지원을 하던 숨 가쁜 상황이었다. 당시 에바다 사람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다산으로 달려갔다. 그들에게 다산 활동가들은 지원병이 아니라 함께 뛰는 동료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돈이 떨어지고 기력이 쇠할 때마다 원군이 나타났다. 1997년 1월 장애인단체와 인권단체 중심으로 전국 공대위가 만들어졌고 그해 겨울 혹한 속에서 '에바다 대학생 비상대책위원회'가 탄생해 평택역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또 1998년 여름에는 참여연대, 민노총 등 33개의 단체들이 모여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를 꾸렸다. 이제 에바다 정상화 투쟁은 평택과 서울을 넘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됐다.
"오히려 잘 된 선생"
15만원이 전 재산이었던 시절, 밤 12시가 넘어 오산, 송탄 시장을 돌며 고철과 빈병을 모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새벽 4시쯤 되면 승용차에 가득할 만큼 폐품이 쌓였다. 6개월 된 아이의 우유 값을 벌기 위해 그런 고역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깜깜한 상황 속에서도 가슴 속에 은근히 솟구치는 뭔가가 있었다. 바닥을 치고 나면 차고 오를 일만 남는 법이다. 7년간 버틸 수 있었던 힘도 분노보다는 유쾌함이었다. 그때부터 권오일 교장의 별명은 '오히려 잘 된 선생'이었다. 극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오히려 잘 됐다"는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그건 바닥을 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오히려 잘된 선생'의 느낌은 학생, 교사들에게 빠르게 전이됐다. 그 시절 에바다 투쟁현장을 방문한 외부인들은 마치 실성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을 만큼 그들은 즐겁게 싸웠다.
권오일 선생님은 뼛속 깊이 유머가 밴 사람이다. 대학 입시 때 얘기다. 입시 2개월 앞두고 입시준비에 들어갔다. 대학에 대한 열망은 가득했으나 아는 것이 없던 시절, 권 선생 특유의 위트가 발동했다. 수학 지식이 전무했던 그가 선택한 것은 14년치 기출문제 분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 분석이 아니라 정답 분석이었다. 사지선다 답변을 쭉 써놓고 비중별 분석을 했다. 시험 당일 문제지는 덮어두고 답지에 통계적, 동물적 감각을 살려 일필휘지로 체크해 갔다. 세계사 공부는 그때 한참 유행이었던 영화배우 이소룡 권법을 요소요소에 배치해 외웠다. 그때 외운 것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결국 하늘도 그 유머를 알아 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에 합격했다. 이후 1993년 에바다 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해 1996년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7년 싸움 끝에 에바다를 정상화시킨 뒤 2011년 교장으로 부임했다. 좀처럼 믿기 힘든 그의 세상살이 이면에는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만의 에너지, 즉 깊이 있는 위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눈물겨운 힘이 있다.
▲ 권오일 에바다 학교 교장.
교장이라고 해서 행여 무게 나가는 검정 차를 타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덜컹거리는 노란 봉고차를 손수 몰고 나타났다. 게다가 '에바다 학교 탁구 선수단'이란 글자를 어찌나 크고 박아놓았는지 야광이 아닌데도 밤길에 눈이 부셨다. 7년의 싸움, 9년의 애정이 뒤섞인 그의 현재엔 사소한 것에도 눈물겹게 하는 힘이 있다.
전국 최초로 한옥 기숙사를 지었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장애인 국가대표 탁구선수를 배출했다고 얘기할 때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가끔씩 교육청 민원으로 곤란을 겪는단다. 학교에 대한 비리나 불만이 아니라 에바다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장애인 학부모들의 호소성 민원이다. 에바다가 걸어온 지난한 세월을 되새겨보면 가히 행복한 비명이다.
그가 어떤 자랑을 하던, 지금의 몇 배를 하던 밉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우리에게 계란이 바위를 깨는 현장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의 말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계란으로 칠 때 바위는 기스 하나 남지 않지만 계란이 바위틈으로 흘러 씨앗의 양식이 되고, 씨앗이 커서 뿌리가 굵어지면 바위를 쪼갤 수 있다는 '생명론'이다. 다른 한 가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에 다른 누군가가 돌을 던지거나 정과 망치로 깨트릴 수도 있다는 '선도론'이다.
운동합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다. 행사가 있다고 해서 가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일 때가 많다. 속 시원하게 이기는 싸움도 별로 없다. 그런데 가끔씩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승리를 맛본다.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의 힘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 계란을 먹고 자라는 씨앗이 있을 것이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은 다산이 뿌린 계란들도 도처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권오일 선생님의 삶속에서 '잠복의 힘'을 되새긴다.
■ 글 : 정미현 다산인권센터 벗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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