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죽인 것은 건물이었다그들을 죽인 것은 건물이었다

Posted at 2015.04.28 10:47 | Posted in 활동소식/기고문 모음


네팔 지진ⓒAP, 뉴시스



지진으로 1천8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네팔 카트만두. 일주일 전, ‘1934년의 강진이 재발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전세계 약 50여명 지진전문가들과 사회학자들이 모여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캠프리지 대학 제임스 잭슨 교수는 “지진은 자연재해지만 카트만두의 피해는 인재”라고 말했다.

또다른 지진학자 데이비드 월드는 “같은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100만명당 사망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0∼30명, 네팔에서 1천명, 파키스탄, 인도, 이란, 중국 등지에서 1만명으로 차별화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건축규제가 없고 내진 설계를 고려하지 않은 느슨한 행정 때문에 부실한 옛 건물이 즐비하고 자녀에게 똑같이 땅을 나눠주는 상속법령 탓에 좁은 부지 위로 건물이 치솟아 지진 피해가 커지는 데 한몫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오해저드 인터내셔널의 하리지 연구원은 “사실 네팔도 카트만두의 지진 위험을 알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댈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예견은 일주일 뒤 잔혹한 현실이 되었고, 현재 진행형이다. 잭슨 교수는 “주민들을 죽인 것은 지진이 아니라 건물이었다”라고 평가했는데, 현지 주민들 말에 따르면 지진이 나자 건물 상당수가 무너졌고, 도로는 두 동강이 났으며 국립경기장 문도 무너져 내렸다 한다. 집 안에서 피해 입고 사망자가 속출한 상황이라 한다.

노벨 경제학상 받은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불평등과 빈곤 연구의 대가이다. ‘센 지수’라고 불리는 지수를 통해 빈곤 측정한 연구로 주목받는 학자이다. 그는 굶주림과 빈곤은 생산의 부족보다 잘못된 분배 탓이라고 주장하는 독특한 경제학자다.

자신이 어릴 때 지켜본 벵골의 처참한 기근도 식량 공급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공급된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해 야기됐다 분석한다. 센은 “경제가 성장해도 빈곤이 줄어들지 않으며 분배를 수정하기 위한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센은 “빈곤과 기아를 해소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은 민주주의”라고 믿는다. 그는 방글라데시나 1950년대의 중국, 아프리카의 대규모 기아사태는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이해하고 정치적 자유보다 권위주의 정부가 신속한 경제발전을 가져온다고 ‘개발독재’ 불가피성을 주장했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와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네팔 지진의 대규모 피해 원인, 사후 대책 과정에서 벌어질 여러 가지 문제를 고민해 본다. 재난과 참사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 전 세계 지진학자들의 예견처럼, 경제학자 센의 주장처럼 사람들은 지진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잘못 설계된 건물 때문에 죽는다.

위험한 배 세월호를 규제 없이 바다 위에 띄웠던 한국은 여전히 규제완화를 외친다. 최고 책임자 대통령은 참사 1주기에 대책 없이 외국 여행길에 올랐다. 대통령 가신들은 비리 주역들이고 그걸 책임지는 자 역시 없다. 돈 받은 이들은 줄행랑이고 돈 줬다는 이들만 희생된다.

부패는 뻔뻔스럽고, 민주주의는 설자리가 없다. 삶과 생명을 보존할 규제는 단두대에 올리겠다고 한다. 책임지는 자가 모두 사라진 대한민국도 지진이다. 만약 이런 나라에서 네팔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누가 먼저 희생될까.

허술한 건물에 둥지를 튼, 대다수 국민이 아니겠나. 네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위태한 우리 운명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2015. 4. 28. 경기일보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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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그들을 죽인 것은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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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고 고맙습니다고맙고 고맙습니다

Posted at 2015.04.28 10:42 | Posted in 활동소식/기고문 모음

찬호 아빠 전명선씨. 그는 4·16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여름이 고개 디밀던 어느 날이었다. 경기도 미술관에 위치한 세월호 정부합동분향소 공기는 그때까지 서늘했다. 유가족들은 낯선 이를 경계했다. 가족대책위 진상규명분과장 찬호 아빠를 만났다.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존엄과 안전이오?”라고 되물었다. 존엄과 안전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언어로 부유한 채 1년이 흘렀다. 정부 시행령안으로 인해, 세월호 특별법은 쓰레기가 될 판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 시간이다. 수사권, 기소권 있는 특별법이 안 된다던 정치와 알량한 조사권마저 갈가리 찢어대는 정부에 의해 “내 자식 죽은 이유를 밝혀달라”는 당연한 호소는 비명이 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무엇이든 안 된다” 말하기 위해 법전이 동원되었다. 바다에서 돌아온 이들에게는 살아왔다는 죄책감,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남았다. 전남 진도 앞바다를 목격한 이름 없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일궈온 체제의 실패를 직관하며 “미안하다”는 고백을 쏟아냈다. 정작 미안하다 위로해야 할 국가만 사라졌다. 구조의 실패에서 끝나지 않았고 애도와 치유, 추모의 실패로 이어졌다. 찬호 아빠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다.

“괜찮지 않아요, 아파요, 많이 아파요”

그는, 그들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서명을 부탁했고 어색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수십 일 단식을 했으며 물집 잡힌 발로 팽목항까지 걸었다. 국회, 청와대 앞, 광화문 앞에서 노숙으로 밤을 새웠다. 지금도 삼보일배 하며 서울로 오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실인 것을 정말 모르냐”며 돈으로 모욕하는 정부에 머리카락을 밀며 대답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이 이런 것이냐, 가족을 위해 일하며 성실하게 세금 내고 살았는데 도대체 이 상황은 무언지 묻는다. 아빠에게는 찬호 없는 식탁의 부재가 304개의 비어버린 저녁 식사로 보인다. 그는 국가의 본질과 체제의 잔인함을 경험하며 앓고 있다. 입술이 퉁퉁 붓고 입안이 온통 헐어버린 그가 걱정돼서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도 돼요? 괜찮지 않아요. 아파요. 많이 아파요.”

문득 어떤 아빠가 떠올랐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의 아빠, 황상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수년 전이었다. “건강하던 딸이 일하다 죽었는데 회사는 개인 질병이라고 합니다. 억울해서 여기저기 찾아갔지만 듣지 않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어떤 전문가도 장담하지 못했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이끌었다. 유미 아빠 황상기씨의 승리였다. 회사는 수십억원을 들고 찾아왔지만 문전박대당했다. 강원도 속초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7년을 오가며 승리를 일궈냈다. 유미의 죽음은 함께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또 다른 유미의 불행을 끝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산재 인정 판결이 확정된 날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나는 유미에게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아빠를 두었습니다.”

비통한 자들이 토닥여준 위로

모질고 잔혹했던 지난 1년은 찬호 아빠가 만들어낸 유미 아빠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랑했던 만큼, 앞으로 사랑할 시간만큼 용감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1년, 유미에게 했듯이 말한다. “당신들은 정말 훌륭한 부모님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훼손된 존엄을 세우는 중이다. 찬호 아빠가 “존엄과 안전이오?”라고 다시 묻는다면, 대답하려 한다. 그것은 당신들의 지난 1년이었습니다. 위로받지 못한 시간 비통한 자들이 토닥여준 위로에 깊은 울음으로 답한다. “고맙습니다.”


2015. 4. 15. 한겨레21 <1057호>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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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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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부치는 편지③] 기대하거나 놀라거나, Anyway you want.[일본에서 부치는 편지③] 기대하거나 놀라거나, Anyway you want.

Posted at 2012.09.04 17:27 | Posted in 칼럼/박선희의 일본에서 부치는 편지

우린 그녀를 '초미녀 작가'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녀의 첫 인사가 그랬다고 우린 주장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자신이 먼저 초미녀 작가라고 소개한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지금 일본에 갔습니다. 다산인권센터 매체편집팀장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훌쩍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놓아 줄 수 없었기에 이렇게 좌충우돌 초미녀 작가의 일본생활을 <다산인권>을 통해 만나려 합니다. 그녀는 박선희입니다.^^





물이 떨어졌다.

숙취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물통 밑바닥에 간당간당 남아있는 물을 보고 있자니 갈증이 절로 났다. 자면서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보름 넘게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 새벽 물을 사러 나서면서도 잔뜩 준비를 했다. 챙 넓은 모자, 얇은 티셔츠, 짧은 반바지, 쪼리 까지. 문을 딱 열고 나서는데 어라, 생각보다(그러니까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전적으로 생각보다) 시원했다. 뭐, 이정도면 괜찮군 하고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현관문을 나서기도 전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살랑살랑 말고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는 꽃과 나무들을 보니 무지 반가웠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데 그 불어오던 바람이란, 게다가 슈퍼 가는 길 끝까지 드리워진 그 너그럽던 그늘. 전혀 생각지 못한 바람과 그늘, 바람과 그늘, 바람과 그늘. 순간 ‘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기대했던 일들 혹은 기대하는 것들은 거의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좌절케 한다. 기다리는 전화는 꼭, 기다릴 때는 걸려오지 않는다. 기다리는데 걸려오면 그건 기다리는 전화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상당히 야무지게 외면한다. 연락은 예상치 못했던 순간, 의외의 곳에서 전해지고 다소 포기하고 실망하며 긴장의 끈을 내려놓고 있던 우리는 뜻밖의 연락에 당황하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빈번하게 기대에 배신당하고 뜻밖의 순간 행복해하면서도 우리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 왜냐면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그 기대감 자체가 많은 순간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이 큰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일이 실현되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당한 시간들을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다. 고단한 일상에 ‘기대’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하루를 견디겠는가.
 
그러니 기대하며 살자.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상상을 마음껏 즐기며 살자. 다시 실망하게 될지라도 기대하는 동안만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것저것 재지 말고 오로지 이루어지기만 할 것처럼 신나게 상상하며 살자. 지금은 지금 뿐, 실망과 후회는 나중의 문제.
 
아니다. 기대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살자. 기대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뜻밖의 것이 되므로 인생은 매순간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매순간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기대를 거두고 감각을 활짝 열어두며 살자. 인생이 매순간 건네주는 선물을 놓치지 않도록 감각을 활짝 열어두고 살자. 눈도 귀도 살갗도,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살자. 지금은 지금 뿐, 놓치면 사라지는 것.  

전자는 행복한 꿈속에 사는 것이고 후자는 삶을 행복한 꿈처럼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든 좋다. 어느 것이든 당신이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의, 네가, 행복한 것.
  
■ 글 : 박선희 (벗바리이자 다산인권센터 일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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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부치는 편지 ②] ‘그나마 다행’이라고.[일본에서 부치는 편지 ②] ‘그나마 다행’이라고.

Posted at 2012.08.06 10:55 | Posted in 칼럼/박선희의 일본에서 부치는 편지


우린 그녀를 '초미녀 작가'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녀의 첫 인사가 그랬다고 우린 주장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자신이 먼저 초미녀 작가라고 소개한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지금 일본에 갔습니다. 다산인권센터 매체편집팀장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훌쩍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놓아 줄 수 없었기에 이렇게 좌충우돌 초미녀 작가의 일본생활을 <다산인권>을 통해 만나려 합니다. 그녀는 박선희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무조건 다이나믹하게 들려드리기 위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 멀리 다녀와 보기도 하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쏘다니기도 했는데 큰 소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존재의 고요한 일상이지요. 이거 정말 낭패인걸,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그래도 유유히 즐긴 기억, 그것은 조용히 간직하기로 하고 대신 일본 생활 3개월 만에 얻게 된 고민다운 고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고민은 어쩔 수 없이 아이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걱정과 달리 적응을 잘하는 듯해 안도했습니다. 유치원 첫 등원 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의 손을 잡고 나오는 아이의 얼굴이 밝아 어찌나 다행이던지, 환한 얼굴로 내일 또 유치원 오고 싶다고 말해 저는 그만 감동까지 받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다닐만한 유치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유치원을 직접 돌아다니며 입학이 가능한지 알아볼 만한 언어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저 대신 남편이 퇴근 후 집에 와서야 근처 유치원 몇 곳에 전화로 문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석연찮았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엔 자리가 남았으니 입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더니 나중엔 스쿨버스에 남는 좌석이 없어서 어렵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통화를 하는 동안 남편의 억양에서 외국인임을 느끼고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러면 적응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며 에둘러 거절을 했고 어떤 곳에서는 단호하게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거절을 당한 유치원을 하나씩 지워나가다보니 집 가까운 곳은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안되겠다 싶었던 남편은 전화 연결이 되자마자 다짜고짜 자기는 어느어느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교사인데 아이를 그 유치원에 보내고 싶다, 내가 다니는 학교와 가까우니 마음 놓고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정중하게 자리가 있으니 내일이라도 오시면 등원이 가능하다고 답해왔습니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리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고나 할까요? 지금 아이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 바로 그곳입니다. 등록을 위해 직접 유치원을 찾아가는 날, 남편은 제게 깔끔하고 단정한 옷으로 골라 입으라고 했습니다. 아이도 마찬가지로 입히라고 했습니다. 혹시나 외국인이라고 얕잡아 보일까 염려해서 한 말이었지요.

사실은 살면서 차별을 몸소 경험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고 나니 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문득 우리 나라에 와 있을 이주노동자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의 아이들은 어느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까, 유독 편견이 심한 우리 나라에서 다닐만한 곳을 찾을 수는 있었을까. 그러다가 또 생각이 났습니다. 엄청난 보육비와 불안한 그들의 처지. 아마 유치원은 꿈도 꾸지 못할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느낄 외로움 혹은 박탈감이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이곳에 오니 보이기도 합니다.

3주 정도 지나자 아이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 오라고 하면 “나는 일본말을 못해서 안돼.”라고 풀죽어 말하고, 자주 울면서 “나를 왜 유치원에 보냈어. 애초에 나를 보내지 말지.”라고 해 제 눈과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혹시 누가 괴롭히나 싶어 초조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급식 시간만 되면 운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그런가 싶어 도시락을 싸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아침에는 스쿨 버스에 올라탄 아이가 창밖으로 저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려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엄마가 유치원에 데려다주면 좋겠다며 우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어서 요즘에는 아침에도 데려다줍니다. 조금 울더라도 버스도 그냥 태워 보내고 급식도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먹으면 먹는 대로 대수롭지 않게 대해주는 게 더 좋은 방법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에게 너의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 딴에는 꽤 힘들 테니 모른 척하기보다 알아주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대신 아이가 울 때는 괜찮다고 웃으며 위로해줍니다. 일본말을 못하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고, 친구들도 한국말 못하지 않느냐고,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는 것이고 너는 지금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유치원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제게 말했습니다. 기쁘게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래도 내일 또 유치원 보낼 일이 걱정입니다. 분명 일요일인 오늘 저녁부터 유치원가기 싫다고 울며 슬퍼할 텐데 달래고 설득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게 과정임을 알고 있지만 조금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는 합니다. 도시락을 만들어 싸고 아이를 챙기기만도 바쁜 아침 시간에 저는 또 깔끔하게 차려입기까지 해야 합니다. 집에서 유치원까지 4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지하철도 한 번 갈아타야 합니다.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고 직접 데려다주고 데리고 올 수 있는 여유가 제게 있다는 것,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닐까요?   

  
■ 글 : 박선희 (벗바리이자 다산인권센터 일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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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부치는 편지①] 첫 인사[일본에서 부치는 편지①] 첫 인사

Posted at 2012.07.09 16:56 | Posted in 칼럼/박선희의 일본에서 부치는 편지


우린 그녀를 '초미녀 작가'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녀의 첫 인사가 그랬다고 우린 주장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자신이 먼저 초미녀 작가라고 소개한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지금 일본에 갔습니다. 다산인권센터 매체편집팀장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훌쩍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놓아 줄 수 없었기에 이렇게 좌충우돌 초미녀 작가의 일본생활을 <다산인권>을 통해 만나려 합니다. 그녀는 박선희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모름지기 ‘두근두근’과 함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대면이라면 첫 대면인데 어떤 시작으로 두근두근한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입니다. 
 
저는 지금 오사카에 있습니다. 오사카에서도 벤텐죠라는 작은 변두리 마을에 있지요. 서울로 치자면 위치는 영등포 쯤, 분위기는 상도동 쯤. 사실 상도동 보다는 훨씬 조용하고 깨끗한 편이긴 합니다. 남편이 오사카에 있는 금강학교라는 곳에서 몇 년 근무를 하게 되어 다섯 살 난 딸아이와 함께 몸은 훌쩍, 마음은 천천히 떠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는 편이고 걱정을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아직은 무난히 지내고 있습니다만, 문득문득 곧 굉장히 외로워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어 혼자 각오를 다지곤 합니다. 별 것 아니라고 말입니다. 내 인생의 몇 할 정도는 그런 외로움과 함께여도 나쁠 것 없지 않나,하고 생각합니다. 비행기표도 엄청나게 싸졌으니까 여차하면 다녀오면 되지, 이렇게 믿는 구석도 있기는 하지만.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밤이었습니다. 물가가 비싼 앞으로의 일본 생활을 고려해서 최대한 저렴한 항공편을 구하다보니 열한 시 넘어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지요. 맨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나무 모양이 다르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집으로, 그러니까 아직 한 번도 발을 디뎌보지는 못했지만 남편이 두 달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던 곳이니까 ‘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유심히 살펴본 것은 나무의 모습이었습니다. 불 밝힌 도시의 모습이란 어디서나 비슷비슷하니까 그럼 다른 건 뭘까 하는 마음으로 버스 창밖을 내다보다가 마침 가로수 길이 펼쳐졌는데 어둔 눈에도 이파리의 생김새나 전체적인 윤곽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나무가 다르구나, 참 좋다.’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 산동네에 살아서인지 저는 나무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좋으냐면 그 연두빛 초록빛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도, 가지 사이로 하늘이 하늘거리는 것도, 비 오기 전후 뽐내는 향긋한 냄새도 모두 좋습니다. 사실은 오래되어 기둥도 굵다랗고 가지도 이리저리 굽이쳐있고 셀 수 없이 많은 나뭇잎이 달린 아주 커다란 나무를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어리고 작은 나무들도 그 나름의 멋이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무들을 만나는 일은 저에게 굉장히 두근대고 즐거운 일입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첫 희망을 ‘나무’에 걸었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된 생활입니다. 
 
일상은 여기서도 생활답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직 유치원에 보내지 못해 하루 종일 딸 아이와 씨름 중입니다. 다정하게 눈 맞추고 웃으며 일어나 깔깔대고, 귀찮아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달래고. 마음속으로 본격적인 일본생활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부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 아이의 첫 등원입니다. 계획과 달리 일본 아이들만 다니는 유치원에 보내게 되어 걱정이 많지만 겪어야 하는 일이라면 담대하게 받아들이자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 이야기는 더 다이나믹해지지 않을까 혼자 기대해봅니다.  
 
3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3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은 가늠하기 힘듭니다. 사실은 어디에 있는 누구의 인생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가늠하기도 예측할 수도 없는 게 ‘진짜 인생’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매순간 살아움직이니까 그리고 언제나 의외의 변수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의외의 변수가 되도록 기막힌 한 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20주년이 된 다산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발을 맞춰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한 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기분 좋게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그러니까 또 만나자는 이야기죠 뭐.   

■ 글 : 박선희 (벗바리이자 다산인권센터 일본 통신원?) 
  1. 허기저
    일본생활에 점점 적응중? 담번엔 무슨 일을 저지르실까 궁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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