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다시 진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용산, 다시 진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

Posted at 2015.01.26 11:33 | Posted in 활동소식/기고문 모음


▲ 2009년 1월 용산참사 현장.


허허벌판인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몇 명이 기억할까. ‘용산참사’라는 고유명사는 들어봤지만 ‘여기가 거기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아직도 6년째 개발 중일 뿐이다.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복판 한강로 대로변, 남일당 건물에서 망루 농성 중이던 철거민 5명과 진압 경찰 한명이 사망했다. 거대한 화재와 함께 사라졌다. 참사 이후 검찰은 철거민만 기소했고 그들은 4년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경찰 특공대 1명의 사망사건에 대한 재판만 있었고 아직 철거민 5명 사망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정당한 공무집행이기 때문에 기소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다. 대법원은 2010년 11월 11일 기소 철거민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약 1년 10개월 만에 사법부의 최종 확정 판결로 용산참사 진실은 묻혔다. 그런데 그게 끝일 수 있을까?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는 것이 없다. 대법원이 끝났다 한들, 진실이 밝혀졌다고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려고 한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누가 그들을 죽였고 누가 그들 죽음의 진실을 은폐했는가…” 참사와 재난이 반복되는 한국 사회에서 1월 20일 화재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처럼. 원인도 밝힐 수 없고, 진실도 알 수 없다면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슬픔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이대로 비탄을 기다리면 되는지 물어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6년 전 사건을 다시 들춘다. 먼지 덮인 서류들을 새로 읽었고 참사의 증인들을 만났다. 뚜벅뚜벅 참사의 새벽으로 걸어 들어간 걸음은 6년 전 그때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진실의 물꼬를 틀 수 있다면 기꺼이 정면으로 마주하려고 한다. 의혹의 첫 출발은 참사를 지휘한 배후는 누구였으며, 그들은 책임졌는지 물어 보려 한다.

첫째 청와대는 몰랐는가

집권 초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선택은 공권력을 통한 강제 진압이었다. 법질서 확립을 주장하며 ‘무관용 원칙’을 천명하고 ‘합법보장·불법필벌’을 강조했다. 이런 과정에서 집권 2년차 이명박 정부는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를 차기 경찰청장 후보자로 내정했다. 다음날 2009년 1월 19일 전철연 소속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전철연 회원들이 한강대로변의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옥상에 망루를 지으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권의 법질서 확립이라는 대원칙에 대한 정면도전 행위였다. 청와대로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원칙에 도전하는 전철연의 농성을 좌시할 수 없었고,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로서도 이를 조기에 진압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망루 농성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기도 전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는 조기 강제진압 계획이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농성 철거민들과 대화나 협상은 추진 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찰력을 투입한 강제진압에 들어갔다.

쌍용차 진압, 청와대 직접보고 그렇다면 용산참사는?


2009년 8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 진압과 관련해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2012년 9월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이 강제진압에 반대하자 “대통령께 직보 해, 허락받았다”고 밝혔다. 쌍용자동차와 관련한 강제진압은 청와대에 직접 보고해 허락 받을 정도의 중대한 사안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은 다를까? 평택에서 노동자들의 공장안 농성을 진입하는데 청와대가 개입했다면, 서울 도심 한복판 농성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서슬 퍼런 집권 2년차를 앞두고 있었다.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매우 서툰 진압 전 과정, 집회시위진압 매뉴얼에도 어긋나는 진압…이것이 과연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와 경찰 자체 판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청와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하지 않았을까? 검찰 수사본부는 청와대의 개입설은 아예 수사대상에도 포함하지 않았다.



▲ 2009년 1월 용산참사 현장.



청와대는 왜 군포연쇄살인사건으로 용산참사를 덮으려 했을까?

2009년 1월 24일,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강호순이 검거되자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사건 보도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곧 청와대가 언론사들에 이메일로 보도 지시했음이 드러났다. 부인하던 청와대는 ‘보도지침’ 내용이 공개되자 이를 시인하고, 이메일 보낸 것으로 확인된 청와대 행정관을 해임했다. 이메일에는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라는 내용들이 있었다. 이 신종 보도지침 사건은 국회에서 잠깐 따지다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이라도 다시 짚어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청와대 행정관 외에 책임질 윗선이 없다는 것인가?

둘째, “김석기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든 현장 상황을 총괄하고 있었다”


참사 당시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는 검찰에 제출한 '사실관계 확인서'에서 "사건 당시 서울경찰청 집무실에 있었으며, 진압 작전 전후 휴대전화를 통해 보고받았을 뿐 실시간으로 직접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은 서면 질의서를 보내 무전 지시를 들었는지에 대해 "무전기는 있었지만 안 켜 놨다"고 답변서를 받았다. 무전기 전원을 켜 놓았는지 유무에 대해서는 추측할 부분이 아니라 객관적 자료로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며 결론적으로 "관련 로그자료 기록이 확보되지 않아 사실 관계를 알 수 없다"고 발표했다. 참사 초기 김석기 내정자가 현장에 있었는지, 현장의 상황을 지휘했는지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검찰은 김석기 내정자를 단 한 번도 소환조사하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보고만 받았지 승인하지 않았다”(김석기 국회 답변)로 결론 내렸다. 참사 발생 1년이 지난 2010년 2월경 국가인권위는 "용산참사에 대한 경찰력 행사는 위법했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국가에 의한 범죄행위의 불처벌' 현상이 발생하고 법치주의에 심대한 장애가 발생한다"며 엄중한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단 한명의 경찰도 책임 지지 않았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1조 제2항의 경찰비례원칙에 어긋나는 경찰권 행사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른 정당한 직무집행이라고 할 수 없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 위반된 다수 사안에 대해 대법원 등은 경찰관의 공무집행 위법성, 과실 등을 인정하여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용산참사는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경찰의 위법한 과잉 진압이 주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철거민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죄(설득과 대화과정 생략, 경찰특공대 투입요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찰력 투입으로 극단적 상황을 초래, 화재발생 물질 완전 소진 전 진압, 유류화재에 대한 미대책, 안전매트 등 안전장비 구비 없는 등 진압과정 안전조치 미실행)가 성립한다. 또한 경찰은 업무상 중대한 과실에 책임이 있다. 진압시 안전수칙 및 고도 주의 의무 위반 책임이 있다. 사망 등에 대한 예견 가능성 및 사망과 주의의무 위반 등의 상당인과관계가 존재 했다. 그러나 검찰은 모든 경찰책임자에 대해 무혐의로, 법원은 재정신청에 대해 기각함으로써 경찰의 법적 책임을 면책했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한다.





김석기는 현장의 상황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하지 않으려던 3000천 쪽 기록 속에는 참사당시 무전녹취 대화가 누구의 것인지 드러난다. 사건 초기 확보된 경찰 무전녹취록의 대화와 현장 지휘부의 무선 내용은 누구의 대화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추가 수사기록을 보면 검찰의 경찰지휘부 신문내용과 무전녹취록 교차 비교로 무전 대화 나눈 이들이 일부 확인된다.

1월 20일 작전 당시 경찰 지휘부 위치를 보면, 용산 현장에는 김수정 서울청 차장 등이 있었다. 서울청에는 이송범 서울청 경비부장과 김원준 경비1과장이 경비계 상황실에 위치하면서 상황에 대한 총괄 지휘를 하고 있다. 상황실 옆방은 김석기 집무실이었다. 이송범은 진술조서에서 중요한 작전변경을 김원준 경비과장 혼자 했다고 진술한다. 김원준 경비과장 역시 “제 개인적으로 판단해서 용산경비과장에게 지시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김수정 서울경찰청 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과장이 단독으로 작전 변경을 지시했던 것이다. 심지어 작전변경은 근본적 변경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당시 김석기 내정자는 사건 지휘 책임이 없음을 ‘무전기를 꺼 놓았다’는 납득할 수 없는 해명으로 회피했다. 진압 지휘 책임자 모두 법적 책임을 면책 받은 지금, 김석기 지휘책임을 묻는 것이 의미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초기에 김석기의 지휘 책임 추론이 가능한 이 상황이 밝혀졌다면, 어떠했을까. 정말 재판은 철거민들 책임만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무리하고 위험한 강제진압 책임을 진 경찰이 단 한명도 없는 상황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여전히 김석기 당시 내정자가 참사 당시 상황을 지휘했는지 여부는 중요한 쟁점이다. 현재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김석기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참사의 책임자가 낙하산으로 정부기관에 버젓이 취임하고, 참사 이후 6년 동안 국가는 단 한명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반성하지 않는 국가 폭력 악순환은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새롭게 용산참사 진상규명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발견한, 여전한 핵심은 그것이었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 진압이 아니고 구조였다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에 대해서 말이다.


2015. 1. 22. 인권오름/프레시안 공동게재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인권오름] 그날도 그 이후로도 책임지는 국가는 없다

[프레시안] 용산참사, MB는 진정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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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④]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그때 그사람 ④]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

Posted at 2012.11.01 15:02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삼성의 희생양 'MJ사원'을 아십니까?
[그때 그사람을 찾습니다·③]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김원효가 외친다. '문제야… 니가 그래서 문제다, 문제야' 김원효의 상대 개그맨 이름이 '문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외친다. '문제야, 저거 봐라 문제야, 그래서 문제다, 문제야'.

개그맨 김원효는 알고 있을까? 상대 개그맨 말고도 이 개그의 소재로 사용되는 '문제'라는 이름으로 12년을 불린 사람이 있다는 걸. 일명 'MJ사원'. 노조를 만들려 시도하거나, 혹은 회사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삼성에서는 'MJ사원', 일명 문제사원이라 부른다. 그 '문제사원'으로 불리며 12년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려버린 사람들이 있다.

12년 동안 감시의 눈초리에 떨어야 했고, 미행하는 차량에 뛰어 올라 울부짖었다. 가족 같던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점심시간 식당에도 못 들어가 굶주려야 했고, 계속되는 협박과 폭언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담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해고되고, 혹은 퇴사 하고 몇 년 동안 삼성에서의 아픈 과거를 생각하며 술로 살아야 했던 이들. 삼성 SDI 해고자 김갑수 씨와 2006년 스스로 회사를 걸어 나온 강재민 씨를 만났다.

▲ 강재민 씨 ⓒ다산인권센터



생각해보면 엊그제인듯 하지만 벌써 12년이나…

"해고싸움이 고법에 갔을 때 다산을 만났어요. 그때는 갈 곳이 없어서 다산 사무실에 많이 가 있었어요. 사무실에 있으면서 활동가들과 같이 선전전도 많이 했어요. 그 때부터 다산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2005년도에는 휴대폰 위치추적과 X-file 사건이 터지면서 다산 식구들과 전국 순회 투쟁도 했어요. 창원, 대구, 울산, 구미를 돌면서 삼성 사건에 대해 알리고, 삼성 바로보기 문화제도 함께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엊그제 같은데, 해고 되고 나서는 한동안 천안을 못갔어요. 너무 화가 나고, 힘들어서.. 그게 벌써 12년이나 지났습니다." - 김갑수

김갑수 씨와 다산의 인연은 12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도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끈질긴 인연을 맺고 있는 김갑수 씨와는 가끔 술도 한잔하고 지낸다. 술을 마시면 빨개진 얼굴로 지난 과거를 읊조리는 그는, 아직도 가슴 깊은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 그의 마음이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버티게 하고 있다. 그나마 해고 된 김갑수 씨가 마음 편했을 수도 있다. 그와 입사동기였던 강재민 씨는 회사에서 모진 수모를 겪은 채 몇 년을 더 버텨야 했다.

"회사에서 퇴사하기 전 모든 걸 잃었어요. 동료도 잃고, 가족도 아프고. 그 당시에는 '내가 (회사를) 나가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나를 건드리면, 나도 회사에서 했던 행동을 사회적으로 공개했죠. 그 쪽에서 한 번 치면, 나도 한번 때리는 식으로 말이죠. 한번은 회사 간부가 전화 한 것을 녹음해 방송으로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가 아무리 미워도 못할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람도 가족이 있는 사람일 텐데, 가족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사람이 극단으로 가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 했는데. 지금 들어 후회가 되죠. 그렇게 2년을 싸웠습니다. 사원들이 회사편이 되어서 나를 따돌리고, 고립 시켰습니다. 휴대폰 위치추적 당시 대표이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했는데, 동료들이 '사장을 고소한 사람은 식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점심시간에 식당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 정도였죠. 결국 버티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2006년 퇴사했습니다." - 강재민

87년 8월 17일 입사. 입사동기인 강재민 씨와 김갑수 씨는 아직도 사번을 외우고 있다. 온갖 괴롭힘과 고통을 준 회사였지만 그들은 처음 입사했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2006년 퇴사한 강재민 씨는 고깃집을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그 고깃집에는 심심치 않게 삼성 직원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MJ사원'은 퇴사 이후에도 'MJ사원'으로 남아있는지 삼성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연합뉴스



상처는 아물었지만 잊혀질 수 없는 과거

이제는 화물트럭을 운전하고 있다는 강재민 씨는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퇴사하고 2~3년 동안은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시면 통제가 안됐다고 하는 그. 상처가 아물었다고는 하지만 잊혀 질 수 있겠는가. 그의 과거는 아직도 아프다.

"현장에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났죠. 알려진 대로, 해외출장을 보내고, 미행하고, 감시했죠. 99년 3월이던가. 노조설립이 발각 됐어요. 해외로 납치되고 돌아와서 해고무효소송을 했죠. 해고되고 나서도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했어요. 그 때 위치추적 사건이 터졌죠. 언론에도 '유령의 친구찾기'라는 것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노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의 휴대폰에 다 위치 찾기가 등록 되어있는 거예요. 친구맺기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본인도 모르게 동의가 되어 있었던 거죠. 대리점가서 확인해보니까 주변 동료들이 다 친구 찾기가 되어 있더라구요. 범인은 누구인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어요. 증거를 확보했어야 하는데, 언론에 먼저 나와서 회사에서 미리 다 손을 써버린 겁니다. 나중에 이 사건은 기소중지 되었죠." - 김갑수

12년째 그는 싸우고 있다.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했던 동료들이 회사와 합의해 떠나고, 회사의 중역이 되어가는 동안 김갑수 씨는 여전히 해고자로 남아있다. 12년 동안 당했던 일들이 끔찍할 법도 했을 텐데, 인간이면 당하고 싶지 않았을 모욕과 고통이었을 텐데도 그는 아직도 삼성에서 노조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동료들을 만났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내 그를 떠나갔다.

삼성은 그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괴롭혔고, 그와 연관된 숨어있는 사람을 뽑아내서 관리했다. 그래서 아무도 주변에 남아있지 않게 했다. 반골 기질을 가진 이, 회사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철저히 관리했다. 노조에 '노'자도 나오지 않게 했다. 12년 전 김갑수 씨가 당한 모욕과 고통의 흔적은 여전히 삼성의 그늘아래 계속 되고 있다.

▲ 김갑수 씨 ⓒ다산인권센터



삼성이 마지막으로 준 교훈

"삼성을 바꾸려면 정치인이 바뀌고, 사회에 바뀌어야 해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되는 것 같아요. 역사를 알아야 후손들이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고, 결국에 가서는 확신은 못하겠지만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길거라 생각해요. 그 시점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을 못하지만. 김갑수는 희생자고, 지금도 싸우고 있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누군가 또 그렇게 길거리로 내팽개쳐지거나, 노동조합에 대한 고민을 갖겠죠. 삼성이 해왔던 걸 기록해야 한다고 봐요." - 강재민

강재민 씨는 이야기 말미에 어떻게든 조용하게 살고 싶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가 인생에 갑자기 뛰어들었던 수많은 논란과 혼란들은 그를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하기에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조용히 사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사는 삶. 그가 삼성에서 마지막으로 보냈던 몇 년의 시간이 그에게 안겨준 교훈이었다.

김갑수, 강재민 씨와의 수다는 몇 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 쓴 소주로 시작해, 커피 한잔으로 이어진 수다는 그들이 겪었던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들이 빈 봉지로 휘휘 저어준 커피믹스가 제일 맛있다는 12년 차 해고자 김갑수, 아침마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화물차 운전을 준비하는 강재민. 그들의 인생은 정말 커피처럼 쓰디 쓴 그 무엇이었다. 그들이 겪었던 그 시간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다만 앞으로 그들의 삶이 평온하기를, 쓰라린 상처가 아물어 새살이 돋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멈췄어야 할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은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 700일 넘게 삼성전자 앞에 서 있는 박종태가, 삼성에 노동조합을 굳건히 세우고 싶다는 삼성노조, 그리고 해고자 조장희가, 삼성화재 해고자 한용기가, 삼성 SDI 해고자 이만신이 여전히 김갑수, 강재민의 과거를 살고 있다.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삼성의 그 무자비한 폭력을, 그 잔인한 짓누름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아닌가. 삼성의 무노조 신화 앞에 쓰러져간 이들의 평온한 일상을 이제 돌려줘야 할 때다. 

■ 글 :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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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Posted at 2012.10.22 14:51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알고 있나? 1997, 그들의 삶을…
[그때 그사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의 삶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인기가 대단했다. HOT를 좋아한 여고생과 그 친구들이 성장기. '응답하라1997'은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고, 그 추억은 아련한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워크맨과 삐삐의 아날로그 감수성은 지금의 것과는 다른 무엇이었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좋아했던 그 과거는 기억만으로도 아름다웠을테니까. 나도 바로 그 세대다.

1997년 고등학교시절을 보낸. 그 당시 모든 10대 청춘들이 겪었던 것처럼 HOT 앓이를 했고, 그들을 위해 풍선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직 어렸기에 15년 전 내가 보았던 세상은 그저 아무 문제없이 평온한 그런 세상이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기였다는 IMF를 TV속 이야기처럼 바라보았던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그런 1997년도처럼….

하지만 내가 보냈던 평온한 일상의 시간과 다른 1997년을 보낸 이들이 있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7'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 검색결과도 그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걸 희미하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는 과거는 시간의 힘을 빌어 재생되지만, 스스로 기억해야 하는 과거는 애써 꺼내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하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 더 희미해지기 전에. '응답하라 1997'의 청춘들과는 다른, 나와는 다른, 또 다른 1997년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1997년 다산과 함께 했던 덕부진흥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말이다.
 

▲ 탁충남 씨. ⓒ다산인권센터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1996년 노개투 총파업이 있었어요. 노동법 개악안이 날치기 통과 된 것을 회사 가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때 파업을 했어요. 안산지역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덕부진흥과 한국후꼬구는 안산에서 유명한 회사였어요. 노동조합도 탄탄하고, 결속력도 좋았으니까요. 이날 민주노총 파업지침은 11시였는데 우리는 먼저 파업을 했어요. 그만큼 열심히 싸우는 회사였죠. 이것 때문에 97년 2월 결국 해고되긴 했지만요. 그때 해고되고 나서 다산을 만났어요. 다산에서 해고 싸움을 맡아줬는데… 안타깝게도 대법에서 패소했어요. 노개투 총파업 관련 해고는 복직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덕부진흥 노동자였던 탁충남 씨는 말했다. 기억해보면 모진 세월이었을 법도 한데 넉살좋게 웃으며 과거 이야기를 술술 들려주었다. 당시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싸우고 싶다며 과거를 기억하는 그를 보며, 아픈 과거가 아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라서 참 다행이라 여겼다. 1997년 덕부진흥에서 해고 이후 대법에서 패소, 그리고 다시 취업한 2군데의 회사에서도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 탁충남 씨는 현재 상조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지역과 노동자들의 삶과 운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자유롭게 출퇴근 할 수 있는 곳으로 고른 직장이란다.

"29살에 익산에서 올라와 덕부진흥에 취직했어요. 남들보다 수완이 좋았는지 잘 보였는지 한 달 반 만에 정규직이 되고. 그길로 노동조합 활동을 했죠. 그러면서 좋은 사람만나 결혼도 했죠. 첫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 해고가 된거죠. 아내는 만삭인데 해고가 돼서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예요. 회사에서 미행하니까. 그때는 미행, 납치, 감금 이런 게 우스웠으니까. 집에 아내 혼자 있는 게 걱정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찾아오면 '영장 제시해라' 요구하라고 미리 귀띔을 해줬죠.

그런데 진짜 경찰이 찾아온 거예요. 아내는 내 얘기만 듣고 '영장 제시해라'라고 하는데 영장이 있어야지. 그때 당시만 해도 노동부랑 경찰이랑 안기부가 다 짜고 일 처리하고 그랬으니까. 아내가 문을 안 열어주니까 만삭인 아내를 집안에 놓고 대문을 발로차고 난리가 아니었나 봐요. 그때 언론에도 이 기사가 실렸죠. 그만큼 잔인했어요."

아무리 후회 없는 과거라 할지라도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무언가는 있지 않겠나? 이런 개인사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며 빼다가 들려준 이야기에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온다. 이때 해고 싸움하면서 집에도 못 들어가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나이 터울이 꽤 난다며 사람 좋게 웃는 탁충남 씨. 그 웃음 뒤에는 가족과 함께 있어주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이 있었다.

"해고 싸움하니까 생계가 어렵죠. 아내는 마트에서 일했어요. 명동성당 천막투쟁. 회사 앞 투쟁으로 6개월 동안 집에 못 갔죠. 그때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게 있었어요. IMF 때문에. 나도 어떻게 그게 됐죠. 한 달에 29만 원씩 나오더라구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연대하러가서 덕부 해고잡니다 하면 다들 고생많다며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했어요. 벌이도 없고. 투쟁은 해야겠고. 집에 돈도 못 갖다 주는데 손도 못 벌리고. 조합원들이 생계비를 마련해주고, 이렇게 열심히 싸운다고 주변에서 도와줘서 대법원까지 간 거죠. 그때 한창 IMF때고, 저희가 그 즈음 싸움을 했으니까. 언론에서 취재도 많이 나오고 TV에도 많이 나왔어요. 근데 TV에 나온 제목이 '고개숙인 남자' 하면서 정리해고 돼서 그네타고 있는 남자로 나온 거예요.(웃음)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IMF때 정리해고로 한창 시끄러웠으니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국민 모두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던 국가부도 사태로 인해 나라는 휘청거렸다. 있는 이들의 탐욕이야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겠지만 없는 이들이야, 서로 따뜻한 밥 한 끼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졌을 때였다. 직장을 잃은, 갈 곳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등장했던 때였다. 직장에 다녀온다며 동네 놀이터를 전전하는 아빠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포착됐던 시절. 1997년 이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이후 사회는 냉랭하게 얼어붙어 왔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게 예의가 되어버리고, 외면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쉽게 쓰다버리는 노동이 늘고, 삶의 권리가 짓밟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1997년에서 시작된 그와의 이야기는 이제 201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 10월 19일 그러나 아직도 1997년

ⓒ다산인권센터



"97년 2월에 해고되고 대법까지 해고투쟁을 했죠. 그 무렵 덕부진흥이 천안 쪽으로 공장을 이전한다고 했어요. 정리해고 한다는 소문은 돌고 단체협약에서도 이주대책 보상도 못해주고, 직원들도 못 데리고 가고, 현지인을 채용하겠다고 해요. 고용불안 형태를 만들었죠. 그때 노조가 회사 측 문서를 입수했는데 거기에 잔업 거부 시 물량대응방안, 노조 대응에 대한 이론전개 방안, 노동부 및 경찰 등에 대한 협조방안 등 정리해고에 따른 노조반발을 예상해 치밀한 대응계획을 다 세워 놓았더라구요.

천안 공장 이전이후에 순환배치하고, 무급 휴직하는 건 다반사였고, 희망퇴직도 받고…. 그러니 자연 퇴사하는 사람도 늘어났죠. 그렇게 노조를 와해시켰어요. 요즘 문제 되고 있는 노조파괴 시나리오랑 비슷하죠? 이때 이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 더 치밀한 노조파괴 전략을 세우는 것 같아요. 그때 근처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용역이 상주하고 엄청나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런 공포감이 주변 노동조합으로 퍼져나갔죠. 요즘 창조컨설팅에서 노조 와해 하는 거 보면 꼭 옛날이랑 똑같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탁충남 씨는 15년 전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지금 들리는 것은 15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의 이야기였다. SJM에서의 폭력사태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겪었던 그것이,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의 현재가 15년 전 이야기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세월은 흘렀지만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아니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시간은 째깍째깍, 사회는 흐르는 시간마저 아쉬워 더 빨리 변해 가는데, 노동자들의 현실은 변하는 게 아쉬운지 아직도 15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고 회사는 잘 됐을까요? 노동조합 와해시키는 데는 성공했죠. 근데 회사도 망했어요. 나중에는 현대모비스에 흡수되어버렸어요. 요즘 들어 그런 생각도 해요. IMF 이후 대기업들이 중견기업들 다 흡수하고 그랬는데 노동조합 무너뜨리고 하는 게 다 인수하기 쉽게 하려고 한건 아닌지. 최근 창조컨설팅 뭐 이런 거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들더라구요. 그때 이후 법은 계속 개악되고 작은 기업들은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그래서 사회자체가 개인적으로 변했죠. 노동자들도 하도 노동자를 천대하니까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2012년 오늘을 살기 위해서

다산 20주년을 맞이하여 함께 했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찾아간 덕부진흥 해고노동자 탁충남 씨. 그의 1997년부터 기억을 기록하기보다는 그때부터 변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해가 뜰 때부터 따라오던 그림자처럼. 노동자의 현실을 조여 오는 사회의 모습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림자다. 1997년 덕부진흥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쌍용자동차가, 재능교육이, 한진중공업이, 유성기업이 그리고 열거하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고 있다.

노동자들과 삶을 나누기 위해 몸 살림을 시작했다는 탁충남 씨. 노동조합 교육시간에 가서도 몸 살림을 하고,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전히 마음 문을 열어놓고 있다. 15년 전 한 노동자가 겪었던 소용돌이는 그에게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의 가치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2명이 송전탑에 올랐다. 대법원에서 판결한 법을 이행하라는 외침이다. 법을 지키라고 목숨을 걸어야하는 현실. 이 사회는 왜 이토록 노동자에게 잔혹한가. 노동자라는 이름이 사라지면, 덕부진흥이 사라졌듯이 기업도 사라진다. 함께 살기 위한 노력. 더 이상 미루지 말자. 1997년과 2012년의 고통은 탁충남이라는 한 노동자들의 삶에서 지혜를 얻게 되길. 


■ 글 :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 원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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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④[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④

Posted at 2012.09.10 10:44 | Posted in 활동소식/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

"'샘' 말대로 하면 다 죽어요" 제자 말에 뻥 뚫렸다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④]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멈춰야

 글 : 정경수 유신고등학교 교사
 프레시안 기사 원문보기 


폭력의 상흔이 남겨져 있다. 붕대를 감은 손과 어깨, 여기저기 붙인 파스에.

민주노총 안산지회 사무실 넓은 강당에서 SJM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많은 노동자들이 혈압검사를 받고 있는 것 같다. 한 줄로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SJM 노동자들의 얼굴은 웃음 반, 피곤함 반이 범벅이 되어 있다. 한쪽에는 아빠 손을 붙잡고 매달리는 아이가 있다. 아마도 토요일이라 아예 자녀를 데리고 사무실에 나온 듯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애초에 인터뷰하기로 했던 분이 경찰 조사 때문에 자리에 없다는 말이 들려온다. 평범했던 이들의 일상이 균열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달리 또 시간을 내어 인터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노동조합 간부로 일하는 손범국 씨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1997년에 입사한 손범국 씨는 SJM 노조 집행부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큰 상처가 없는 것 같아 인터뷰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한결 편하다. 손범국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병역특례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오토바이 때문에 회사 측과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그것을 기회로 노조 활동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부터 오토바이를 쭉 타고 다녔는데, 누군가 사고가 난 이후 (회사 측에서) 갑자기 '이제부턴 오토바이 타고 다니지 마라', 이런 거예요. (…) 회사 측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전 못 쓰겠다고 했어요. 기분이 나빠서요. 아니, 그럼 누군가 자동차 타고 다니다가 사고 나면, 모두 다 자동차 못 타고 다니게 할 것이냐는 거죠. 말도 안 되는 것이죠."

일상 곳곳의 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반항으로 손범국 씨의 노조 활동은 시작된 듯했다. 손범국 씨의 말을 듣는 동안 1987년 노동자 투쟁 당시 한 기업의 첫 번째 단체협약 내용이 '두발 자유화'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노동자를 통제하고자 하는 기업주와 관리자의 속내에는 인간에 대한 오만하고 불손한 폭력이 담겨 있다.

"그전에는 관리자나 기업주가 시키는 대로 했었는데,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참 좋더라고요. 혼자 말하기 힘들면 대변해 주기도 하고, 정말 매력 있잖아요.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 했었는데…."

손범국 씨에게 노조는 인간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여 '인간'다운 삶과 노동을 그려볼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학생들에게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정식 교육과정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학교 교육은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게 하고 있는가? 노동자의 권리와 삶은 부정하고 자본의 삶, 경쟁력 있는 인생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지 않나? 교사가 아니라 때로 국가와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죄의식이 나를 자주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불편함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손범국 씨는 학교 교육에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다만, 교사들이 가끔은 교과서와는 다른, 언론과 정부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라도 해주길 바랄 뿐이라고만 말한다.

"내가 그동안 듣고 보고 느껴왔던 것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것을 배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전부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다른 책들도 읽어 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학교에서 '네가 배우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서 한쪽 방향으로 쓰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만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학생의 몫이죠."

▲ 손범국 씨. ⓒ다산인권센터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학생들

이같이 교육의 결과를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는 것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교육 논리다. 하지만 정부와 자본의 대응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몇 해 전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교과서 서술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철저하게 친정부적, 친자본적 논리로 교과서를 서술하게끔 하고 있다.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서술이 단 한 줄도 없는 경제교과서조차 반기업적이라고 매도한다. 그리고 전경련은 더욱더 자본에 유리한 경제교과서를 '대안(?)'교과서라고 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반노동적 교육 강요보다 더 끔찍한 것은 학생들의 눈으로 읽는 현실이다.

정부와 자본은 삼촌과 사촌누나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못 잡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생들은 월급을 약속한 대로 주지 않는 사장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불법을 저질러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폭력적 노동현실을 통해 학생에게 노동자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하는 것은 SJM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벨로우즈로 맞아 피 흘리는 현실과 동일하다.

"(그 벨로우즈는) 저녁 내내 만든 것이잖아요. 밤 11시 50분까지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5시간 뒤에, 6시간 뒤에 (그것이) 우리에게 날아올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맞고, 피 흘리고, 머리 터지고…." 자신이 만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 자체를 배신당한 것이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속한 교육현실 속에서 배신당하는 과정을 맛보고 있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은 바로 교육환경을 극악하게 만드는 배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공부 못하면, 힘들게 사는 거잖아요. 힘들게 안 살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죠.' 학생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봉사활동이든 자치활동이든 '스펙'을 쌓아서 사장님이 되기 위한 연습만을 한다. 결국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자기 삶과 자기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길을 걷는다.

지난 학기에 '파업'을 소재로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정부, 노동자, 사용자 측 입장에 서서 역할 수업을 해 보는 것이었다. 노동자 측 학생들의 요구에 대한 사용자 측, 정부 측 학생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현실을 반영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적나라한 간접경험을 통해 학생들이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애써 거부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XX하게 힘들겠구나'를 뼈저리게 느끼고, '학업에 열중하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기배반적 행동을 선택한 학생들. 그것도 안 되면 그들은 학교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는 두려움과 공포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이다. 본질적으로 SJM 노동자를 비롯하여 지배계급 이외의 사람들은 '인간'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반인권적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들은 '앞뒤 가리지 말고 깨버려라'는 지시를 용역폭력배에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돈 있으면 저렇게 해도 된다'고, '저렇게 해도 정부와 경찰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않고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조합원들이 7월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노조원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한 경비업체 컨택터스와 이를 지시한 ㈜SJM, 폭력사태를 묵인한 안산단원경찰서를 검찰에 고소, 고발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컨택터스가 노조원들에게 던진 자동차 부품을 기자회견장에 들고 나왔다. ⓒ연합뉴스



잘못된 시스템 멈추기 위해, 하던 일 모두 멈춰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나는 막막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염치조차 없는 저들의 행동에 오히려 막막하고 답답해진다. 이런 답답함과 무력감이 느껴질 때, 한 학생이 수업시간에 한 말이 생각났다.

타임머신을 타고 산업혁명 즈음으로 가서 교사인 내가 자본가 입장이 되고, 학생들은 노동자 입장이 되어 노동기본권을 확보해 보는 논리 게임을 해 보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수많은 논리로 노동기본권을 주장해 보았지만 '자유방임', '재산권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무장한 교사인 나를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 자본과 정부처럼 행동하는 나를 학생들이 논리로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때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논리고 뭐고 다 필요 없고요. '샘' 말대로 하면 우리들은 다 굶어 죽게 생겼으니, 그냥 일 안 할래요. 어차피 죽을 텐데요, 뭐." 순간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손범국 씨의 아홉 살짜리 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왜 나가? 일 안 해도 되는데 왜 나가?" 이제 공장으로 가는 대신 농성장으로, 연대집회로, 노동조합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는 아빠가 이상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손범국 씨 딸의 말처럼 이러한 시스템을 멈추기 위해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싶을 때 당당히 회사로,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번 SJM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손범국 씨의 말처럼. 그들의 공장이 아니라 우리의 현장이며 공간인 곳으로. 오히려 그들의 시스템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딴짓을 하는 것. 공장과 같은 학교, 학교와 같은 공장…. 닮은 그 현장에서 내가 얻은 답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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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③[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③

Posted at 2012.09.07 13:24 | Posted in 활동소식/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

참 MB스러운 사건, 평범한 주부들은 왜 나섰나?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③] 귀족 노조? 죽도록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글 : 정미현 국가기관 무기계약 노동자
 프레시안 기사 원문보기 

지난 5년 동안 MB의 혁혁한 공은 분노의 무감화다. 매번 분노하다가는 명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국민들 스스로 아픈 것을 아프지 않은 것으로 오판하게 만들었다. "동물 중성화 수술도 아니고 이거 원" 하면서도 사람들은 분노에 둔감해졌다. MB의 수에 이미 말린 나는 SJM 사건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회사에서 꼼수를 부려 노조가 한마디 했더니 회사가 문을 닫아버렸다. 황당한 노동자들 뭐라 한 마디 더하니 용역을 불러 두들겨 팼고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 "나는 아무한테도 손 안 댔다"며 깔끔하게 마무리 진 사건. 참 MB스러운 사건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다산인권센터에서 벗바리 자격으로 SJM 사건을 인터뷰 해달라고 했다. 살짝 걱정스러웠다. 깔끔하게 정리한 사건에서 "진실"을 볼까봐, "사람"을 볼까봐, 그래서 마음을 다칠까봐.

허나 약속은 약속, SJM노조 가족대책위 대표 김활신(이하 그녀) 씨를 만났다.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는 입에서 단내라도 날 듯 바빠 보였다. 역시나 SJM 앞에서 문화제가 있었는데 율동을 하고 저녁도 안 먹고 달려왔다. 내가 건넸던 스카치캔디 두 개와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율동이었냐고 물으니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라고 했다. 군데군데 흰 서리가 내려앉은 사십대 후반 여성의 율동이라…. 노조원 부인 7명이 함께 했다고 했다. 두 시간씩 며칠간의 훈련 끝에 오늘 자리에 섰다고 한다. 선한 듯, 수줍은 듯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꺼내는데 괜히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 김활신 SJM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다산인권센터



"다 같이 하면 이기는 거다"

가족모임은 4-5년 전에 결성되었고 활동이 뜸하다가 이번 일로 다시 모였다. 가족대책위의 분위기는 아직까지는 "다 같이 하면 이기는 거다"는 분위기. 사실 SJM 는 안산지역에서 근로조건도 좋고 노사상생의 모범 기업처럼 알려진 회사였다. 가끔 노사협상 과정에서 잡음은 있었으나 원만히 타협이 되었고 그만큼 노동자들도 회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실제 딱 한명의 비정규직이 있었고 그 역시 노조 가입을 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던 회사가 3년 전 노무이사가 바뀐 후부터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2011년 초부터 구조조정설을 유포하며 노조원들을 자극했다. 단체협약을 무시하는 일들도 빈번해졌다. 노사 협의도 없이 비정규직을 투입하더니 제 3공장 식당을 외주로 돌려버렸다. 해명을 요구하던 조합원들에게 돌아온 건 컨택터스라는 경비용역깡패의 투입이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회사를 아들한테 물려주려는데 노조를 어떻게든 무력화 시켜야 한다는 회장의 강박이 적지 않게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적인 분배로 회사 운영하면 바보되는 사회"

이 부분에서 그녀의 톤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주회사 만들어 내부 차액을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정상적인 분배로 회사 운영하면 바보가 되는 사회, 경영합리화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들을 헌신짝처럼 내치는 사회, 천박한 자본주의가 계속 되는 한 제2의 SJM, 제2의 쌍용은 계속 될 거라고 했다. 회사를 믿었던 만큼 노조원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컸다. 해고가 되더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 터라 결집력은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일 새벽 3시, 연락 받고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담을 넘어 농성자들과 함께 했고, 직장 폐쇄 첫날에는 노조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현장 최고직급인 기장 한분이 "평소에 조합이 하는 일을 같이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함께 하겠다"고도 했다. 우리 안에 모르고 있던 연대의 느낌, 동료애를 느끼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더 단단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대학생 딸을 둔 노조원은 다른 노조원 자녀들 과외활동을 추진해 보겠다고 했고, 맞벌이 나가는 부인은 평소에 참여 못해 미안하다며 주말에 나와 일일이 인사를 다닌다고 한다. 노조와 가족대책위는 아직까지는 모이면 신나고 희망적이라고 했다. 물론 9월 5일부터 월급이 안 나오고, 추석이 지나고 사건이 장기화되면 다들 각오를 해야겠지만 아직까지는 현재만 보고 달리고 싶다고 했다.

뭘 각오해야 되는 것일까? 평균 근속 년수 20년인 SJM 노동자들의 평범한 삶 속에 찾아든 각오는 뭘까?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 97년 결혼했고 남편은 원래 대우조선을 다녔다고 한다. 남편은 젊은 사람들이 산재로, 과로로 퍽 퍽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회사를 나와 99년에 SJM에 입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안산지역에서 평준화 운동, 무상 급식조례 제정 활동을 했다. 지난한 노력 끝에 다행히도 2013년부터 안산지역이 평준화될 예정이고 무상급식 문제도 나름 성과를 냈다. 성공의 경험이 지금 큰 밑천이 된다고 했다.

귀족 노조? 죽도록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남편 연봉은 5000만 원 정도다. 먹고 싶은 거 먹고, 걱정 않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가끔씩 가족 여행도 다닌다. 비교적 넉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족노조라는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현재의 주간연속 2교대가 시작되기 전인 작년까지, 주야간 2교대, 주말 특근 한 두 번을 포함하여 한 달 100시간 이상의 잔업을 해야 했다. 일하는 동안에는 죽도록 일한다.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생산직 노동자가 돈 많이 받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노동자들도 스스로 귀족노동자라는 언어에 갇혀 주눅이 들어있다. 왜 정당하게 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데 눈치를 보는가? 정상적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문제다. 법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녀는 최근 대학원에 입학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 쫓아내고, 쫓겨난 노동자는 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복직을 위해 싸워야 하고, 긴 세월 싸워 복직해도 다시 해고되고 마는 사회. 분명히 정상이 아닌데 버젓이 그렇게 세상이 돌아간다. 사실 노동운동이 세상의 변화를 못 쫓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왜소화되거나,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대학원에 진학했다. 노동자협동조합 쪽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

쌍용 문제에 대해서도 그녀는 단호했다. 주저 않고 말했다. 국가에서 '사람'을 버린 사건이라고. 이번 일로 도움을 받으면서 어렵게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노조원들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업장을 지지방문도 하고 구체적인 연대의 길도 모색하고 있다.

ⓒ다산인권센터




엄마들 나서다

평범한 주부들이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편이 뼈 빠지게 일하던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 욕심내지 않고 살았다. 안정적일 뿐 사치부리며 살지 않았다. 그런데 남의 얘긴 줄만 알았던 직장이 폐쇄되고 남편이 농성을 시작했다. 빨간 띠와 검정 조끼를 두르면 다 빨갱이 같고, 강성 같고, 딴 나라 얘기 같았는데 남편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른바 빨갱이로 낙인찍힌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같이 모이니 자꾸만 힘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에 놀라워하고 있다. 나날이 배운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희망 같은 것,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렵지만 그렇게 가야 된다는 믿음. 그녀는 확신한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우린 모두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그들의 믿음이, 그녀의 확신이 빠른 시일 안에 검증되기를, 그리고 무감화된 분노가 다시 우리 안에 용트림 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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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②[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②

Posted at 2012.09.03 11:17 | Posted in 활동소식/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

"대통령님, 노예처럼 일하는 귀족도 있나요?"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②] SJM 폭력, 경찰·대통령의 2차 가해

■ 글 : 이광훈 경희대 후마니티스 칼리지 강사
■ 프레시안 기사 원문보기 
      
15년간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레지스탕스 출신의 93세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를 접한 나는 심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귀국하자마자 밥벌이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양심이 가리킨 곳은 달랐다.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다산인권센터를 알게 되었고, 그곳을 통해 알게 된 수원촛불에서 매주 수요일 촛불을 들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SJM노동자 인터뷰를 제안 받고 선뜻 나선 길에 노동자 박동혁 씨를 만났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면서, 현장을 지키던 박동혁 씨는 용역직원들에게 쫓겨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래서 다리와 발을 다쳐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불과 며칠 전 퇴원했다고 한다. 끔찍했던 불면의 밤이 한 달이 지났건만 아직 그의 발바닥에는 멍자욱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완치되지 않은 그는 절룩거렸고, 그보다 더 심하게 상한 마음도 절룩거리고 있었다.

▲ 용역직원에게 쫓겨 옥상에서 뛰어내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박동혁 씨의 발바닥에는 아직 멍자욱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다산인권센터



먼지와 쇳가루 마셔가며 일한 대가가 '용역폭력'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코막힘 때문에 불편해 했다. 감기냐고 조심스레 물으니, 알레르기 비염이란다. 안산에 와서 심해졌는데 공장에서 먼지와 쇳가루 속에서 온종일 일을 해야 하니 낫기는커녕 마스크 등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고도 했다. 그나마 예전에는 안전장구조차 없이 일을 했다고 덧붙인다. 대부분 나이든 동료들은 안정장구 없이 소음 심한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심각한 청각장애가 있다고 했다. 그러한 동료에 비하면 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얘기한다. 몸이 상해가면서 7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는 용역에게 노동자들의 자리를 내어주고, 직장폐쇄를 해버렸다.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일한 노동자들이 받은 배신감을 생각해 보면 자신은 그래도 덜 상처 받은 것이라며, 멍자욱도 남보다 내 것이 작으니, 나는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더 걱정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그들은 알까.

휴가를 떠나기로 되어 있던 박동혁씨는 7월 27일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공장에 나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동료의 전화를 받고 부인에게 별일 없을 것이니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고 공장으로 갔다.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들고 진압봉을 든 그들이 경찰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용역직원들인 줄 알고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공장 안으로 들이닥치겠는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나라 갑자기 용역들이 SJM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들의 폭력을 사진에 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경비실 옥상에 올라갔다. 회사로 물밀듯이 용역들이 들이 닥치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그를 향해 욕을 하며 달려오는 용역들을 피하려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때는 오른발 뒤꿈치 뼈가 으스러진 줄도 몰랐다. 삐끗했다고 생각했고 용역들에게 쫓겨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2층으로 그 발을 질질 끌면서 도망갔다. 아픈 줄 몰랐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상황이 수습되고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간 병원. 그 날 상처의 치료는 입사이후 가장 긴 휴가를 선물했다. 3주 넘게 입원한 후 통원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상황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용역폭력에 대한 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자신이 다친 피해자임에도 4시간이나 계속된 조사에서 그는 노조에 대한 질문이나 유도성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과연 그들이 피해자인가? 우리가 가해자인가? 마지막에 서명할 때, 그는 자신을 조사한 경찰관에게 자신이 피해자인지 피의자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말했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경찰이 더는 미덥지가 않다.

평범한 서민이 '귀족노동자'로 몰리기까지…

박동혁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배달, 웨이터 등 많은 일을 했다. 기술을 익혀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 보자고 생각해서 특수용접을 배웠다. 그 기술로 직장에 취직했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대학을 가야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7년 전에 SJM에 입사했는데, 오래간만에 들어온 신입이라고 부서에 있던 선참 노동자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 채용이 되지 않아 아직도 막내다. 직장 분위기도 좋았고 노조는 튼튼했다. 단체협약도 잘 되었고 야간근무는 강제적이지 않았다. 그 점이 너무 좋았다. 계획했던 대학을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특근과 야근에 지쳐서 회사와 집을 오가며 파김치가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회사 생활을 그만 둔 이유였다. 노동조합이 있는 SJM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었다. 다른 회사로 옮길 것도 생각해 봤지만, 다른데 가더라도 여기보다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정을 가지면서 안정적인 직장에 있었으면 했고 그리고 이 회사 동료와 함께 일하고 지내는 것이 좋았다.
 

▲ 박동혁 씨의 두 살 난 아들. ⓒ다산인권센터


야간대학 다닐 때 만난 예쁜 각시와 결혼도 하고, 지금은 곧 만 24개월이 되어 가는 아들도 있다. 용역폭력과 직장폐쇄라는 사태가 가져온 상황이 없다면, 그의 집은 여느 신혼부부의 집이 그렇듯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시간외 노동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 빠듯한 생활 때문에 부인은 얼마 전부터 맞벌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SJM을 두고 한 말인지 이명박 대통령이 노동자 중에 월급을 많이 받는 귀족노동자가 있다 했단다. 우리가 귀족이냐고, 대통령이 말한 월급 벌려면 매일 밤새워 일해야 하는데 노예처럼 일하는 귀족이 어떻게 귀족이냐고 되묻는다. 인터뷰 중 아빠를 부르며 그와 부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들을 보는 그의 행복한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경찰도, 대통령도 외면한 '노동자'의 삶

박동혁 씨에게 지금 가장 큰 소원이야 빨리 직장폐쇄가 풀리고 회사에 복귀해서 일하는 것이다. 그런 평범한 그는 이번 사태로 배운 게 있다. 한국에서 노동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아 버렸다.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이 노동자를 폭행하고, 폭력을 막아야 할 경찰은 노동자들을 보호도 안 하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귀족노동자들 운운하면서 노조를 헐뜯고 있는 이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어려움. 자기 아들이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마음먹고 있었던 대로 외국에 나가서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해야 하나 생각한다. 과연 이 사회가 박동혁 씨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인가? 작지만 소소한 일상을 누리고 싶어하던 한 아이의 아빠, 이 시대의 노동자에게 사회는 폭력으로 절룩이게 만드는 마음만을 안겨줬다.

15년 동안 떠나있던 한국은 많이 바뀌어져있었다. 가끔 미국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가 찾아오면 '한국은 왜 이렇게 돈 돈 하는거냐' 물었다. 나 역시도 15년 전 한국과 지금이 너무나 달라져보였고, 그 중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돈이 뭐라고, 7년을 일한 그에게, 15년을 일한 그의 동료들에게 54억 원이라는 돈을 들여 폭력을 사주했다. 그가 평생 밤새워 일해도 벌 수 없는 그 돈이, 그의 7년 직장 생활, 청춘의 일부분을 무너뜨렸다. 평온한 일상을 사랑했던 직장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그 조각들을 다시 맞추는 일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의 아픈 다리가 다시 회복되는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직장이 그가 보냈던 청춘의 한 부분의 조각이 다시 맞춰지길 바라본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조각이라도 나의 작은 글이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광훈 경희대 강사와 SJM 노동자 박동혁 씨. ⓒ다산인권센터




  1. 통감합니다.
    이제는 우리 노동자를 위한 용역회사를 설리하여야 겟습닏.
    우리 노동자는 돈이 없으니, 자원 봉사 단체 용역회사 말입니다.
    쉽지 않겠죠
    하지만, 분명 길이 있을 것이며
    이것만이 노동자가 살 수있는 길일것입니다.
    정치권도, 가진자도 있는 용역회사를 왜 우리 노동자는 없을 까요
    이제는 노조설립보다 먼저 노동자를 위한 용역회사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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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①[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①

Posted at 2012.08.31 10:34 | Posted in 활동소식/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

두들겨 팬 용역보다 '조폭두목'처럼 설쳐댄 회사가…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①] 정년을 앞둔 SJM 노동자 이상열 씨

■ 글 : 김철환 전 아주대학교 교수 
 

SJM의 용역폭력 사태로 인해, 많은 이들이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테러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이번 사태는 일부 용역업체의 불법적 행위와 폭력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만연했던 민주노조에 관한 자본의 공격적 행동을 폭로한 사건이기도 했다. 
·
다산인권센터와 <프레시안>은 노동기본권이 무엇이며, 노동자가 바로 자신이고 가족이고 이웃인 평범한 사람들임을 알릴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기획은 지난해 경기지역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해서 <사람꽃을 만나다>를 발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산인권센터가 SJM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인터뷰했다. 첫 회는 전 아주대 김철환 교수가 정년을 앞둔 SJM노동자 이상열 씨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아주대 김철환 교수는 퇴임직전까지 아주대 교수회의 의장을 맡아, 사학비리와 싸웠다. 

퇴직을 앞둔 어느 날 평생을 바친 회사로부터 배신당한 아픔, 그러나 그보다 남겨진 후배들의 처지 때문에 걱정이라는 노동자 이상열 씨. 그는 회사를 퇴직해도 노동조합은 퇴직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들의 오랜 대화를 김철환 교수가 글로 보내줬다. <편집자>



그의 첫 인상은 곱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다. 오랜 기간 산업현장에서 일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마에 주름 하나도 없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도 없다. 그 험한 꼴을 당한 사람이라면 의당 내뿜어야 할 분노도 가슴 속에서 삭이는 모양이다.

그 보다도 그의 부인이 용역의 만행과 회사의 부당함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방방 뜬다"고 전한다. 그에게는 분노의 분출보다도 앞으로 후배들이 겪어야만 할 어려움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가족 같은 직원 관계"가 무너지고 "원만하던 노사관계"가 3년 전부터 어긋나더니 급기야는 파국의 경지에 이르게 된 현재의 상태가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에게 이번 에스제이엠(SJM) 사태는 퇴직을 불과 몇 달 남겨 놓고 겪어야만 하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는 금년 말 12월에 퇴직할 예정이다. 1987년에 입사했으니 무려 25년을 재직한 회사이다. 회사가 설립 된지 37년이니 그의 삶이 회사의 삶과 거의 중첩된다. 힘들었던 철야작업도 수당 받는 재미보다 회사가 잘나간다는 안도와 자랑스러움으로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SJM은 "가족 같은 우리 회사"였다. 직원 사이의 관계도 상사, 부하의 수직적이고 경직적이라기보다는 서로 서로의 애경사를 챙겨주고 돌봐주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회사에 오랜 기간 몸담았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설악산이나 강원도 등지에서 가졌던 야유회와 체육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았던 일"이었다. 부인과 애들도 함께 즐겼던 야유회와 체육대회에는 회장님과 임원 모두도 참가했던 화목한 모임이었다.

▲ 이상열 씨. ⓒ다산인권센터



노동자의 헌신으로 어려움을 뚫고 나간 창업 초기

창업 초기 회사가 여러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힘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헌신이다. 회사와 노동자가 동일체가 되면 될수록 노동의 강도는 헌신적으로 강해진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창업주들은 이 회사가 "우리의 회사"임을 강조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 열심히 일하고, 함께 이익을 나누면서 함께 가자고 강조한다. 아마도 창업후 일정 기간 SJM은 사장과 고용된 사람이 함께 키우려는 문자 그대로의 "우리 회사"였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새벽 아수라장의 공포와 후배 조합원들이 당한 야만적 폭력에 대한 분노 속에서도 회사 창업자를 꼬박 꼬박 "회장님"이라고 호칭한다. 그의 인생을 바쳤던 "우리 회사"에 대한 애정이 들여다보인다. 재벌회사의 절대 권력을 칭하는 "CM(Chair Man)"과는 전혀 다른 사람 냄새가 풍기는 "회장님"이다.

실상 그 동안 SJM은 안산지역에서 세인의 입에 오를만한 노사분규가 없었던 사업장이었다. 오히려 노사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평판이 좋은 사업장이었다. 노조가 설립될 당시에는 SJM은 한국노총에 가입했었다. 노조가 3대에 이르러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할 당시 겪었던 진통이 가장 큰 분규였다. 당시 조합원들은 협박과 회유를 당했지만 다행히 부당하게 해고 되었던 노조위원장은 복직되었고, 일시적인 상처는 원만하게 치유되었다.

"가슴 아픈 일 없었던 회사"가 변하기 시작했다. 회사 직원과 그 가족, 그리고 회장님과 임원 모두가 함께 했던 야유회가 대표이사만이 참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최근에는 노무이사만이 참가하는 마치 "노무팀과 함께 하는 형식적인 야유회 체육대회"가 되어 버렸다.

원만했던 노사관계도 변하기 시작했다. 3년 전부터 노무를 전담하는 이사가 외부에서 영입되었다. 이번 컨택터스라는 용역업체를 동원하고 현장에서 지휘하던 노무이사가 바로 그 때 영입된 인물이다. 노사가 과거에는 "대등하게 진행되었던 협상이 대화 보다는 일방적으로 회사의 주장만 되풀이하고 노조를 무시"하는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부터 5월 사이에 진행되었던 협상에는 대표이사가 12차까지 불참하고 노무이사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되풀이 되는 파행이 발생했다.

노사관계가 경직되고 상호 믿음에 균열이 발생하고 협상이 파행으로 이어진 것은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회사는 그 동안 꾸준하게 성장하여 탄탄해졌다. SJM은 이 번 사태에서 흉기로 둔갑한 벨로우 생산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남아공 중국 등에 현지공장을 설립하는 해외투자도 확대되어 왔다. 회사가 탄탄해지면서 계열회사도 확대되었다. SJM 홀딩스라는 지주회사도 설립되었다.

이익구조가 탄탄해지면서 변한 회사

회사는 약정한 성과급의 배분에도 꼼수를 쓰기 시작했다. 200억 원의 순이익이 발생한 해에도 그 이익을 성과급으로 배분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국내에서 발생한 이익금 20억 원만이 성과급의 대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와 함께 막대한 순수익을 내던 회사가 적자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창업주인 김00 회장의 장남인 김00 상무에게 지분이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 이상열 씨(왼편)와 김철환 교수(오른편). ⓒ다산인권센터

창업 초기 어려울 때 창업주가 강조하던 "우리 회사"가 이익구조가 탄탄해지면 "내 회사"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과 사회의 특징이다. SJM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끝없는 탐욕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세태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세계에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이익 추구보다는 교육이라는 사회의 공공재를 생산하는 공익법인인 대학마저도 이러한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금반지 팔아서 만든 내 대학"은 대물림되고, 사유화 되는 현상은 비난은 고사하고 하나의 관행으로 이미 뿌리내려 있다.

SJM의 노사관계가 조금씩 삐걱대고 파행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파국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총에 가입되어 있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강성 노조'라고 오해받고 그러한 워딩의 편견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물론 SJM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노사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고용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부 사업장에서 부분적인 파업에 들어가 있었을 뿐 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갑작스럽게 직장폐쇄 조치를 취했고, 파업을 하지 않고 있던 제3공장에도 "문 때려 잠그고 나가라"라는 통보를 했다.

"올 것이 왔다"라는 불안감 속에서 노조원들의 농성이 진행되는 와중에 그는 저녁에 퇴근했다. 새벽 4시 잠이 깬 그에게 전화가 왔다. 용역들이 진입하고 농성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는 전화였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가 현장으로 가야겠다는 결정에 이른 시간은 채 5분도 안되었다. 그는 옷을 걸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불과 10분에서 15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후문으로 현장으로 들어갔다. 2층 노조 사무실에 사람들이 몰려져 있고, 참혹한 현장은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사태의 위험성과 더 큰 사고를 우려한 조합원들이 2층 사무실에서 나가겠다고 용역회사에 요청했다. 이 때 회사의 노무이사는 현장의 용역 책임자와 무엇인지를 협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나가는 와중에 용역들이 회사 제품을 담아 논 박스에서 물건을 끄집어 내 던지기 시작했다. 나가겠다고 하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흉기로 공격한 것이다. 여성조합원들에게도 가해지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그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리와 허벅지를 곤봉으로 맞는 폭행을 당했다. 다른 조합원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2차 공격은 1차 공격보다는 약했다고 한다.

ⓒ다산인권센터



용역보다 더 원망스러운 회사

그는 현장에서 두들겨 맞고 피신한 직후에는 목숨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도 엄습하는 좌절과 불안의 감정이 더 컸다고 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섭섭한 대상은 그들을 공격한 용역이 아니다. 용역보다는 회사가 더 원망스럽다. 특히 "조폭 두목처럼 현장에서 설치던" 노무담당 이사가 그의 마음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에게 가장 섭섭한 대상은 경찰이다. "머리가 깨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사람이 생기는 참혹한 현장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부동자세에서 처다 보지도 않고" 외면하던 경찰에 대한 그의 원망은 그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하기야 "살려 달라, 안에 사람이 죽는다"라는 절규를 만행의 현장에서 외면하는 공권력에 대한 국민의 절망감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과 퇴직을 몇 달 남겨 논 그의 입장에서는 "험난한 분규의 현장에서 벗어나"는 감정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현장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는 후배 조합원들"이 겪어야 할 앞으로의 문제가 제일 걱정스럽다. 그도 다른 나이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층의 흥분을 진정시키면서 회사가 파국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회사 측이 사과한 후에 원만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바람을 외면하는 듯하다. 회사는 사태를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직장폐쇄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업체만 바뀐 용역직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쫓겨난 노동자들은 아직도 공장 밖에서 농성 중이다. 회사는 심지어 노조원들에 대해 고소를 한 상태이다. 그는 앞으로가 더욱 걱정이다. 농성에서 빠져 나오고 노조를 탈퇴하라는 회사의 집요한 공작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노조 간부에 대한 민사상의 손배소가 이어질 것이고, 제2노조가 설립될 것이다. 이러한 만행은 또 다른 사업장으로 번질 것이다. 이러한 비극과 만행을 끝내야 한다.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이유이다.

* SJM 문제해결과 용역폭력 근절을 위한 시민문화난장이 1일 오후 5시부터 SJM 공장 앞에서 열린다. 길거리 강연을 비롯해, 허클베리핀, 지민주, 연영석, 이지상 등의 공연도 진행된다. 아래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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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 대학생인 나는 왜 '용역 깡패'가 됐나[활동소식] 대학생인 나는 왜 '용역 깡패'가 됐나

Posted at 2012.08.14 14:16 | Posted in 활동소식

* 본 글은 다산인권센터로 제보된 내용을 토대로 <프레시안>에서 기사로 작성된 것입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대학생인 나는 왜 '용역 깡패'가 됐나

[폭력의 악순환, 용역]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나도 살기 위해…"




 
부산에 있는 한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민우(29·가명) 씨. 3년 전 대학에 재입학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20대 초반에 대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이 씨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녔다. 하지만 고졸 학력으론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대학에 다시 입학한 이유다.

아직 졸업하려면 4학기가 넘게 남았다. 모든 걸 혼자해결해야 하는 이 씨에게 대학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론 제대로 졸업할지도 미지수다. 돈이 문제다. 가정 형편은 여전히 좋지 않다. 혼자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방학 때는 늘 학기 수업료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 두 달 동안 힘들게 일해야 겨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 이전에 일하던 경험을 살려 공사현장 등에서 전선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위험한 작업이라 수당이 꽤 높았다.

일하다 여러 군데를 다치기도 했다. 배관 절단 작업을 하다 다리에 철이 박히기도 했다. 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워낙 험한 일이다 보니 상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몸이 고장 났다. 일하는 게 무리였다.

ⓒ다산인권센터



경비업체인 줄 알고 간 곳이 용역 업체

당장 이번 여름방학 때부터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케이블 설치처럼 단가가 높은 아르바이트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우여곡절끝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경비직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일반 아파트 경비와 같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일당도 하루 10만 원이었다. 숙식도 가능했다. 일하는 곳이 인천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곧바로 지원했다.

면접도 없었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오라는 통보만 받았다. 급히 옷가지 등만 챙겨 도착한 곳에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어림잡아 1400명은 넘어 보였다. 이곳에 모여 인천으로 간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당일 날 만난 담당자는 주소가 변경됐다며 강원도 원주로 가라고 했다.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오기 싫은 사람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엄포를 놓았다. 부산에서 온 이 씨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전세 관광버스를 타고 원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만도기계 문막 공장이었다. 파업사태를 겪고 있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게다가 통상적인 경비업이 아니었다. 노조원이 공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을 했다. 일명 '용역'이었다. 그게 지난 7월 27일의 일이었다.

이 씨가 이곳에서 맡은 일은 공장 정문에 서 있는 일이었다. 'security'라고 적힌 방패 하나만 주어졌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이 씨가 공장에 들어올 당시, 노조원들은 휴가 중이라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잤다. 나머지 8시간은 대기시간이었다. 말이 대기시간이었지 사실상 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이 터지면 곧바로 달려가야 했다. 사실상 16시간을 일하는 셈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육두문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노조원에 불안해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공장 내 대회의실, 복도, 강당 등에서 침낭 하나를 깔고 자야 했다. 옷 세탁은 화장실에서 해야 했다. 샤워장을 사용하기 위해선 밤샘 근무 이후, 3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나 이용할 수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았다.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이 씨를 괴롭혔다. 주급으로 주겠다던 임금은 15일 단위로 지급하겠다고 멋대로 바꿔버렸다. 알아보니 이 씨가 속한 회사는 일명 '유령회사'였다. 법인도 없고, 회사 거주지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커뮤니티 카페 회원 수 3명을 가진, 작년 11월에 만든 회사였다.

정신적으로도 괴로웠다. 언제 노조원이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까 노심초사했다. 근무 업체 부장의 괴롭힘도 견디기 어려웠다. 항상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 육두문자는 기본이었고 인격 모독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아니꼬우면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경비이수증도 마찬가지였다. 경비근무를 하려면 이수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처음 서울에 집합했을 때, 담당자는 경비이수증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근무 중 갑자기 '경찰이 들어와 경비이수증 검사를 한다'며 이 씨 등을 옥상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업체의 장난이었다. 그렇게 장난을 친 뒤 업체에선 경찰이 단속할지도 모르니 경비이수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며 14만 원을 내라고 했다.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하지만 이수증을 만들지 않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이 이 씨는 돈을 주고 이수증을 발급받았다.

등록금 걱정에 '울며 겨자 먹기'로 2주를 이곳에서 버텼다. 하지만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언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렇게 일하고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산인권센터




함께 일한 200여 명 중 절반이 처음 용역 일 접해

이 씨가 일했던 곳은 자동차부품회사 만도 공장에 투입된 용역경비업체 '지원가드'다. 지원가드는 사실상 CJ시큐리티가 만든 유령회사로 알려졌다. CJ시큐리티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3M, 재능교육, 구미KEC 등 노사 분규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지원가드는 지난달 27일 만도의 문막·평택·익산 공장에 1400여 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모인 뒤, 각각 정해진 장소로 흩어졌다. 이 씨도 여기에 포함됐던 셈이다.

문제는 이들 1400여 명 경비원 가운데 상당수가 결격사유를 지녔다는 점이다. 경찰 조사 결과, 만도 익산 공장에 배치된 200여 명의 경비원 가운데 20명이, 만도 문막 공장에 배치된 경비원 587명 가운데 264명이, 만도 평택 공장은 신고된 경비원 657명 가운데 66명이 교육 미이수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400여 명의 경비원 가운데 350명이 '부적격자'인 셈이다.

이 씨가 일한 만도 문막공장에 투입된 경비원들의 경우, 가짜 교육이수증을 나눠준 정황도 드러났다. 현행법상 경비원 경험이 없는 사람은 현장 투입 전 28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를 따르면 자신과 같이 일하던 200여 명의 용역 아르바이트생 중 절반이 20대 청년들로 이 일을 처음 하는 이들이었다.

누가 그들을 내몰고 있는가 

이 씨는 일을 그만둔 뒤, 부산으로 내려와 막노동하고 있다. 조만간 다시 용역 업체에 들어가려 준비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막노동으로는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그간 언론에서 자신을 '용역 깡패'로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답답하다고 했다. 이 씨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씨는 "폭력적이지 않은 아르바이트생과 갓 스무 살 넘은 대학생들은 두려움에 떨며 근무를 선다"며 "그리고 긴급 상황에 놓여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고 밝혔다. 이 씨는 "물론 우리는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면서 "하지만 우리 역시 안타까운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씨는 "우리와 맞서 싸우는 노조원에게도 죄송하고, 스스로 두려움을 만드는 선택을 한 저 자신에게도 미안하다"며 "하지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 학교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물론 용역 일을 하는 것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며 "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 씨는 "나 역시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산인권센터와 <프레시안>은 컨택터스를 비롯한 각종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용역으로 일하면서 받는 비인간적인 처우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용역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처를 보듬고, 도울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돕고자 합니다. 부당한 처우에 관해 고소를 원할 경우, 법률지원도 해드립니다. 어려운 길은 한 발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래 연락처로 제보 바랍니다.

▶ 다산인권센터: 이메일 humandasan@gmail.com / 트위터 @humandasan
▶ 프레시안 : 이메일 kakiru@pressian.com
  1. 이번 프레시안 기사가 다산인권센터에 제보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었군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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