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양보할 수 없는 인권의 가치를 지키며,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20주년]양보할 수 없는 인권의 가치를 지키며,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Posted at 2012. 11. 7. 14:15 | Posted in 20주년소식



난다와 다산인권센터의 만남...
우리 모두 인권의 가치를 지키며 살겠다는 약속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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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언론보도 모음[20주년] 언론보도 모음

Posted at 2012. 11. 5. 12:25 | Posted in 20주년소식

다산인권센터 20주년 관련 '민망한' 언론보도 모음입니다. ^^

▲ '민망함'의 대표적인 사진^^;. 출처 : 경기일보



[프레시안] "인권엔 양보 없다"…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 콘서트
[오마이뉴스] "대한문 앞 천막 농성? 20년 전엔 상상못할 일"
[한겨레] 산업재해·국가폭력 맞서 싸운 든든한 ‘인권지킴이’ 성년 되다
[한겨레21] 수원의 인권지킴이, 스무 살 되다
[수원일보] 20주년 맞은 다산인권센터 '인권콘서트'
[경인일보] 인터뷰/수원 다산인권센터 20주년 맞은 김칠준 변호사
[경기일보] '사회적 약자의 등불' 다산인권센터, 20년 발자취
[뉴시스] '약자들의 버팀목' 다산인권센터 출범 20주년
[뉴시스] 인터뷰 /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진씨
[참세상] 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 인권콘서트 열려
[프레시안] '인권에는 양보가 없다'…탄생 20주년 맞은 다산인권센터

보도해 주신 각 언론사 기자 여러분.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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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첫 마음으로, 인권운동 하겠습니다.[20주년] 첫 마음으로, 인권운동 하겠습니다.

Posted at 2012. 11. 5. 10:57 | Posted in 20주년소식

사진 : 이상엽



고맙습니다. 
비정규직 투쟁과 여러 행사가 겹쳤던 27일,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  사실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수개월 동안 20주년 행사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써주시고 고생하셨는데
사람이 적게 오면 어떻하나...
며칠전부터 걱정 걱정 입에 달고 살았더니 저희보다 더 걱정해주신 분들이
다른 약속, 일정 제쳐두고 와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

생명평화대행진 일정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인 노래와 말씀을 선물해주신
문정현 신부님.
서울 공연일정을 빼면서까지 와주시고 큰 웃음을 주신
옹알스 여러분들.
감동적인 노래와 신명나는 기운을 나눠주신
강허달림, 이한철 밴드.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회를 맡아주시고,
관객분들의 억지스럽지 않은 '다산' 연호를 자연스레 '연출'해주신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님,


뒤풀이 시간까지 그림 그려주시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
이동슈 화백님,

그림과 사진으로 도움을 주신
노순택, 이윤엽, 임종길 작가님,

 행사 처음부터 끝까지 수화통역을 해주신
김종옥 님,  

20년의 역사를 담는 백서발간과 영상제작에 함께해주신
유승하 만화가, 김현주 님,  

찾아온 손님여러분들께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해주신
하늬바람님과 친구분들, 


그리고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끝까지 함께 해주신
20주년 비대위 여러분.

무엇보다, 없는 시간 쪼개서 짐나르고 공연연습하고 궂은일 맡아주신
자원활동가 여러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다산인권센터, 20년 전 첫 마음처럼
인권운동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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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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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렌지가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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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④]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그때 그사람 ④]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

Posted at 2012. 11. 1. 15:02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삼성의 희생양 'MJ사원'을 아십니까?
[그때 그사람을 찾습니다·③] 삼성SDI 해고자 김갑수, 강재민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김원효가 외친다. '문제야… 니가 그래서 문제다, 문제야' 김원효의 상대 개그맨 이름이 '문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외친다. '문제야, 저거 봐라 문제야, 그래서 문제다, 문제야'.

개그맨 김원효는 알고 있을까? 상대 개그맨 말고도 이 개그의 소재로 사용되는 '문제'라는 이름으로 12년을 불린 사람이 있다는 걸. 일명 'MJ사원'. 노조를 만들려 시도하거나, 혹은 회사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삼성에서는 'MJ사원', 일명 문제사원이라 부른다. 그 '문제사원'으로 불리며 12년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려버린 사람들이 있다.

12년 동안 감시의 눈초리에 떨어야 했고, 미행하는 차량에 뛰어 올라 울부짖었다. 가족 같던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점심시간 식당에도 못 들어가 굶주려야 했고, 계속되는 협박과 폭언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담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해고되고, 혹은 퇴사 하고 몇 년 동안 삼성에서의 아픈 과거를 생각하며 술로 살아야 했던 이들. 삼성 SDI 해고자 김갑수 씨와 2006년 스스로 회사를 걸어 나온 강재민 씨를 만났다.

▲ 강재민 씨 ⓒ다산인권센터



생각해보면 엊그제인듯 하지만 벌써 12년이나…

"해고싸움이 고법에 갔을 때 다산을 만났어요. 그때는 갈 곳이 없어서 다산 사무실에 많이 가 있었어요. 사무실에 있으면서 활동가들과 같이 선전전도 많이 했어요. 그 때부터 다산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2005년도에는 휴대폰 위치추적과 X-file 사건이 터지면서 다산 식구들과 전국 순회 투쟁도 했어요. 창원, 대구, 울산, 구미를 돌면서 삼성 사건에 대해 알리고, 삼성 바로보기 문화제도 함께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엊그제 같은데, 해고 되고 나서는 한동안 천안을 못갔어요. 너무 화가 나고, 힘들어서.. 그게 벌써 12년이나 지났습니다." - 김갑수

김갑수 씨와 다산의 인연은 12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도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끈질긴 인연을 맺고 있는 김갑수 씨와는 가끔 술도 한잔하고 지낸다. 술을 마시면 빨개진 얼굴로 지난 과거를 읊조리는 그는, 아직도 가슴 깊은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 그의 마음이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버티게 하고 있다. 그나마 해고 된 김갑수 씨가 마음 편했을 수도 있다. 그와 입사동기였던 강재민 씨는 회사에서 모진 수모를 겪은 채 몇 년을 더 버텨야 했다.

"회사에서 퇴사하기 전 모든 걸 잃었어요. 동료도 잃고, 가족도 아프고. 그 당시에는 '내가 (회사를) 나가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나를 건드리면, 나도 회사에서 했던 행동을 사회적으로 공개했죠. 그 쪽에서 한 번 치면, 나도 한번 때리는 식으로 말이죠. 한번은 회사 간부가 전화 한 것을 녹음해 방송으로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가 아무리 미워도 못할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람도 가족이 있는 사람일 텐데, 가족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사람이 극단으로 가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 했는데. 지금 들어 후회가 되죠. 그렇게 2년을 싸웠습니다. 사원들이 회사편이 되어서 나를 따돌리고, 고립 시켰습니다. 휴대폰 위치추적 당시 대표이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했는데, 동료들이 '사장을 고소한 사람은 식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점심시간에 식당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 정도였죠. 결국 버티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2006년 퇴사했습니다." - 강재민

87년 8월 17일 입사. 입사동기인 강재민 씨와 김갑수 씨는 아직도 사번을 외우고 있다. 온갖 괴롭힘과 고통을 준 회사였지만 그들은 처음 입사했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2006년 퇴사한 강재민 씨는 고깃집을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그 고깃집에는 심심치 않게 삼성 직원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MJ사원'은 퇴사 이후에도 'MJ사원'으로 남아있는지 삼성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연합뉴스



상처는 아물었지만 잊혀질 수 없는 과거

이제는 화물트럭을 운전하고 있다는 강재민 씨는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퇴사하고 2~3년 동안은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시면 통제가 안됐다고 하는 그. 상처가 아물었다고는 하지만 잊혀 질 수 있겠는가. 그의 과거는 아직도 아프다.

"현장에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났죠. 알려진 대로, 해외출장을 보내고, 미행하고, 감시했죠. 99년 3월이던가. 노조설립이 발각 됐어요. 해외로 납치되고 돌아와서 해고무효소송을 했죠. 해고되고 나서도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했어요. 그 때 위치추적 사건이 터졌죠. 언론에도 '유령의 친구찾기'라는 것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노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의 휴대폰에 다 위치 찾기가 등록 되어있는 거예요. 친구맺기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본인도 모르게 동의가 되어 있었던 거죠. 대리점가서 확인해보니까 주변 동료들이 다 친구 찾기가 되어 있더라구요. 범인은 누구인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어요. 증거를 확보했어야 하는데, 언론에 먼저 나와서 회사에서 미리 다 손을 써버린 겁니다. 나중에 이 사건은 기소중지 되었죠." - 김갑수

12년째 그는 싸우고 있다.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했던 동료들이 회사와 합의해 떠나고, 회사의 중역이 되어가는 동안 김갑수 씨는 여전히 해고자로 남아있다. 12년 동안 당했던 일들이 끔찍할 법도 했을 텐데, 인간이면 당하고 싶지 않았을 모욕과 고통이었을 텐데도 그는 아직도 삼성에서 노조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동료들을 만났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내 그를 떠나갔다.

삼성은 그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괴롭혔고, 그와 연관된 숨어있는 사람을 뽑아내서 관리했다. 그래서 아무도 주변에 남아있지 않게 했다. 반골 기질을 가진 이, 회사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철저히 관리했다. 노조에 '노'자도 나오지 않게 했다. 12년 전 김갑수 씨가 당한 모욕과 고통의 흔적은 여전히 삼성의 그늘아래 계속 되고 있다.

▲ 김갑수 씨 ⓒ다산인권센터



삼성이 마지막으로 준 교훈

"삼성을 바꾸려면 정치인이 바뀌고, 사회에 바뀌어야 해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되는 것 같아요. 역사를 알아야 후손들이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고, 결국에 가서는 확신은 못하겠지만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길거라 생각해요. 그 시점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을 못하지만. 김갑수는 희생자고, 지금도 싸우고 있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누군가 또 그렇게 길거리로 내팽개쳐지거나, 노동조합에 대한 고민을 갖겠죠. 삼성이 해왔던 걸 기록해야 한다고 봐요." - 강재민

강재민 씨는 이야기 말미에 어떻게든 조용하게 살고 싶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가 인생에 갑자기 뛰어들었던 수많은 논란과 혼란들은 그를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하기에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조용히 사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사는 삶. 그가 삼성에서 마지막으로 보냈던 몇 년의 시간이 그에게 안겨준 교훈이었다.

김갑수, 강재민 씨와의 수다는 몇 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 쓴 소주로 시작해, 커피 한잔으로 이어진 수다는 그들이 겪었던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들이 빈 봉지로 휘휘 저어준 커피믹스가 제일 맛있다는 12년 차 해고자 김갑수, 아침마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화물차 운전을 준비하는 강재민. 그들의 인생은 정말 커피처럼 쓰디 쓴 그 무엇이었다. 그들이 겪었던 그 시간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다만 앞으로 그들의 삶이 평온하기를, 쓰라린 상처가 아물어 새살이 돋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멈췄어야 할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은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 700일 넘게 삼성전자 앞에 서 있는 박종태가, 삼성에 노동조합을 굳건히 세우고 싶다는 삼성노조, 그리고 해고자 조장희가, 삼성화재 해고자 한용기가, 삼성 SDI 해고자 이만신이 여전히 김갑수, 강재민의 과거를 살고 있다.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삼성의 그 무자비한 폭력을, 그 잔인한 짓누름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아닌가. 삼성의 무노조 신화 앞에 쓰러져간 이들의 평온한 일상을 이제 돌려줘야 할 때다. 

■ 글 :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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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③] 권오일 교장을 만나다[그때 그사람 ③] 권오일 교장을 만나다

Posted at 2012. 10. 25. 10:26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에바다 학교, 계란으로 바위 깬 사연
[기고] 권오일 교장을 만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법무법인 다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다. 평택 에바다 농아원생들이 다산을 향해 오물을 날렸다. 돌도 날렸던 것 같다. 에바다 학교는 청각장애인이 모여 있는 농아학교였다. 비리재단 피해자인 장애인이 재단을 비호하는 상황, 소리 없는 그들의 눈빛이 만만치 않았다. 쉽게 끝날 싸움 같지 않았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된 지 6년째라고 했다. 그 후로도 1년간 싸움은 계속되었고, 2003년에서야 에바다는 정상화됐다. 싸움의 중심에 섰던 권오일 선생님을 10년 만에 만났다. 그는 현재 에바다 학교 교장이다.

인터넷에서 '에바다 학교'를 찾아보면 농아인 탁구 국가대표를 배출한 학교, 모범적인 장애인 학교로 나온다. 한때 '장애인 교육비리 재단' '에바다 사태'라는 오명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던 에바다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권오일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싸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거다.

"96년 11월 27일 새벽 5시 농아원생 26명이 농성을 시작했어요. 5분 만에 경찰들이 출동해 전원 연행해 가는데 경찰이 학생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세 명이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전쟁 상황이었죠."

농아원생 70여 명을 미국으로 돈 받고 팔고, 이름 바꿔치기해서 시청으로부터 이중 지원받고, 학교 옆에 있는 제본공장에 새벽까지 강제 노동시키고,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는 극한의 인권유린 속에서 농아원생들의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당시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기숙사 입구 문이 부서져 있고 교실 여기저기선 아이들이 울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인데 학교에서는 이번 일에 나서는 교사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학생부장이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죠. 교사가 21명이었는데 두 시간 격론 끝에 11명의 교사가 결의했어요. 파면, 해임 아니 이 정도 비리라면 경찰, 관청 할 것 없이 모두 연관돼 있으니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 하지만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사는 것 보다 낫다, 법정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살자. 그건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교사로서의 양심,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이렇게 11명의 교사가 모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2개월, 길어도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싸움은 장장 7년에 걸쳐 진행됐다. 교사와 원생은 둘로 쪼개졌다. 재단 쪽과 반대 쪽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제자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머리끄덩이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이쪽 아이들이 저쪽 아이들로부터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기도 했다. 급기야 허위 사실로 고소 고발이 남발되는 상황으로 확대되면서 에바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무렵 <경인일보> 노영란 기자가 주한미군의 에바다 학생 성추행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보도하면서 에바다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사건 초기부터 다산인권센터의 김칠준 변호사, 박진 간사, 송원찬 소장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기자가 파헤치고 인권 활동가들이 뛰고 변호사가 법률지원을 하던 숨 가쁜 상황이었다. 당시 에바다 사람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다산으로 달려갔다. 그들에게 다산 활동가들은 지원병이 아니라 함께 뛰는 동료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돈이 떨어지고 기력이 쇠할 때마다 원군이 나타났다. 1997년 1월 장애인단체와 인권단체 중심으로 전국 공대위가 만들어졌고 그해 겨울 혹한 속에서 '에바다 대학생 비상대책위원회'가 탄생해 평택역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또 1998년 여름에는 참여연대, 민노총 등 33개의 단체들이 모여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를 꾸렸다. 이제 에바다 정상화 투쟁은 평택과 서울을 넘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됐다.

"오히려 잘 된 선생"

15만원이 전 재산이었던 시절, 밤 12시가 넘어 오산, 송탄 시장을 돌며 고철과 빈병을 모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새벽 4시쯤 되면 승용차에 가득할 만큼 폐품이 쌓였다. 6개월 된 아이의 우유 값을 벌기 위해 그런 고역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깜깜한 상황 속에서도 가슴 속에 은근히 솟구치는 뭔가가 있었다. 바닥을 치고 나면 차고 오를 일만 남는 법이다. 7년간 버틸 수 있었던 힘도 분노보다는 유쾌함이었다. 그때부터 권오일 교장의 별명은 '오히려 잘 된 선생'이었다. 극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오히려 잘 됐다"는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그건 바닥을 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오히려 잘된 선생'의 느낌은 학생, 교사들에게 빠르게 전이됐다. 그 시절 에바다 투쟁현장을 방문한 외부인들은 마치 실성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을 만큼 그들은 즐겁게 싸웠다.

권오일 선생님은 뼛속 깊이 유머가 밴 사람이다. 대학 입시 때 얘기다. 입시 2개월 앞두고 입시준비에 들어갔다. 대학에 대한 열망은 가득했으나 아는 것이 없던 시절, 권 선생 특유의 위트가 발동했다. 수학 지식이 전무했던 그가 선택한 것은 14년치 기출문제 분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 분석이 아니라 정답 분석이었다. 사지선다 답변을 쭉 써놓고 비중별 분석을 했다. 시험 당일 문제지는 덮어두고 답지에 통계적, 동물적 감각을 살려 일필휘지로 체크해 갔다. 세계사 공부는 그때 한참 유행이었던 영화배우 이소룡 권법을 요소요소에 배치해 외웠다. 그때 외운 것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결국 하늘도 그 유머를 알아 봐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에 합격했다. 이후 1993년 에바다 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해 1996년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7년 싸움 끝에 에바다를 정상화시킨 뒤 2011년 교장으로 부임했다. 좀처럼 믿기 힘든 그의 세상살이 이면에는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만의 에너지, 즉 깊이 있는 위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눈물겨운 힘이 있다.


▲ 권오일 에바다 학교 교장.


교장이라고 해서 행여 무게 나가는 검정 차를 타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덜컹거리는 노란 봉고차를 손수 몰고 나타났다. 게다가 '에바다 학교 탁구 선수단'이란 글자를 어찌나 크고 박아놓았는지 야광이 아닌데도 밤길에 눈이 부셨다. 7년의 싸움, 9년의 애정이 뒤섞인 그의 현재엔 사소한 것에도 눈물겹게 하는 힘이 있다.

전국 최초로 한옥 기숙사를 지었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장애인 국가대표 탁구선수를 배출했다고 얘기할 때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가끔씩 교육청 민원으로 곤란을 겪는단다. 학교에 대한 비리나 불만이 아니라 에바다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장애인 학부모들의 호소성 민원이다. 에바다가 걸어온 지난한 세월을 되새겨보면 가히 행복한 비명이다.

그가 어떤 자랑을 하던, 지금의 몇 배를 하던 밉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우리에게 계란이 바위를 깨는 현장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의 말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계란으로 칠 때 바위는 기스 하나 남지 않지만 계란이 바위틈으로 흘러 씨앗의 양식이 되고, 씨앗이 커서 뿌리가 굵어지면 바위를 쪼갤 수 있다는 '생명론'이다. 다른 한 가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에 다른 누군가가 돌을 던지거나 정과 망치로 깨트릴 수도 있다는 '선도론'이다.

운동합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다. 행사가 있다고 해서 가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일 때가 많다. 속 시원하게 이기는 싸움도 별로 없다. 그런데 가끔씩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승리를 맛본다.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의 힘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 계란을 먹고 자라는 씨앗이 있을 것이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은 다산이 뿌린 계란들도 도처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권오일 선생님의 삶속에서 '잠복의 힘'을 되새긴다. 
      
■ 글 : 정미현 다산인권센터 벗바리 
 프레시안 원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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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 인권콘서트 출연진 소개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 인권콘서트 출연진 소개

Posted at 2012. 10. 23. 16:03 | Posted in 20주년소식

10월 27일(토) 오후 5시부터 진행되는

인권콘서트의 빵빵한 출연진을 소개합니다!
 


■ 옹알스


 


옹알스가 뭐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국내 보다 해외에서 더욱 유명한 분들이라고 합니다.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2년 연속 초대되고 에든버러 페스티벌 쪽에서 TOP 12에 선정되기도 했답니다. 영국 BBC 방송이 극찬한 한류 개그^^<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퍼포디언’ 그룹 ‘옹알스’ (‘퍼포디언’이란 말은 ‘퍼포먼스’와 ‘코미디언’의 합성어).  조수원, 조준우, 최기섭 세 사람이 의기투합한 ‘옹알스는 SBS와 KBS 공채 출신의 개그맨인 이들은, 말 대신 행동과 소리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느 날 한 보육시설에 위문공연을 하러 갔는데, 청력 장애가 있거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시설이었다고 하네요.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개그맨들도 함께 공연했지만, 보육시설의 아이들을 웃기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옹알스가 공연을 시작하자 들리지 않고,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반응을 보였답니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러대고, 재미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웃음을 주는 데 꼭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고 하는 옹알스. 이 분들 꼭 만나고 싶었는데요, 이번 콘서트에서 만날 수 있답니다.

■ 강허달림
 



가수 강허달림은 지난 <2009지역운동포럼 in 수원>에서 진행된 콘서트에 초청된바 있습니다. 최근 2집앨범 '넌 나의 바다'를 내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왕따들에게만 인기있는 가수"라 자평하지만 감성적인 블루스음악을 통해 많은 분들이 강허달림의 음악과 노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돕는 ‘이야기 해주세요’ 음반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적 활동 역시 꾸준히 해 오면서 이번 다산인권센터 20주년 콘서트에도 출연을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 이한철

 
가수 이한철님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괜찮아 잘될꺼야~'로 시작되는 <슈퍼스타>와 요즘에 나온 <흘러간다> 등 감성을 촉촉히 적시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한철 님은 가수활동 뿐만 아니라 장애인 관련 행사 등 사회적 약자의 삶도 함께 노래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이 가을과 더욱 어울릴 것 같네요. 
 
 

■ 김칠준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다산인권센터의 전신인 '다산인권상담소'를 만드신 분. 지금도 인권의 현장에서 법률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현장파 변호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명박 집권 후 국가인권위가 망가지는 상황을 처절히(?) 겪었던 김칠준 변호사님은 다시 법무법인 다산으로 복귀 한 후 변호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20주년 콘서트에서는 직접 편지를 낭송하신다고 하는데...혹자는 재판에서 변호하는 분위기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도....^^


■ 문정현


사진출처 : 민중의소리

 
문.정.현.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없는 분이죠. 저 허연 수염과 웃음...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시면서 지금도 제주강정마을에서 생명평화를 위한 현장활동을 멈추지 않는 길위의 신부님.  2012생명평화대행진을 하고 계시지만 잠시 짬을 내서 다산인권센터 20주년을 축하해주시러 오신답니다. 물론...축하노래도 해주신다는 소문이...파다합니다...^^

■ 그리고 다산인권센터 사람들

 

먼 길, 바쁜 길 오셨을 많은 분들께 그냥 보내드리면 안되겠죠? 다산인권센터 상임, 자원활동가들이 준비한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면 너무 기대를 하실려나...^^; 아무튼, 이번 콘서트는 다산인권센터를 사랑해주시는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우리, 27일날 꼭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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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Posted at 2012. 10. 22. 14:51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알고 있나? 1997, 그들의 삶을…
[그때 그사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의 삶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인기가 대단했다. HOT를 좋아한 여고생과 그 친구들이 성장기. '응답하라1997'은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고, 그 추억은 아련한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워크맨과 삐삐의 아날로그 감수성은 지금의 것과는 다른 무엇이었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좋아했던 그 과거는 기억만으로도 아름다웠을테니까. 나도 바로 그 세대다.

1997년 고등학교시절을 보낸. 그 당시 모든 10대 청춘들이 겪었던 것처럼 HOT 앓이를 했고, 그들을 위해 풍선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직 어렸기에 15년 전 내가 보았던 세상은 그저 아무 문제없이 평온한 그런 세상이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기였다는 IMF를 TV속 이야기처럼 바라보았던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그런 1997년도처럼….

하지만 내가 보냈던 평온한 일상의 시간과 다른 1997년을 보낸 이들이 있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7'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 검색결과도 그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걸 희미하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는 과거는 시간의 힘을 빌어 재생되지만, 스스로 기억해야 하는 과거는 애써 꺼내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하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 더 희미해지기 전에. '응답하라 1997'의 청춘들과는 다른, 나와는 다른, 또 다른 1997년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1997년 다산과 함께 했던 덕부진흥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말이다.
 

▲ 탁충남 씨. ⓒ다산인권센터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1996년 노개투 총파업이 있었어요. 노동법 개악안이 날치기 통과 된 것을 회사 가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때 파업을 했어요. 안산지역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덕부진흥과 한국후꼬구는 안산에서 유명한 회사였어요. 노동조합도 탄탄하고, 결속력도 좋았으니까요. 이날 민주노총 파업지침은 11시였는데 우리는 먼저 파업을 했어요. 그만큼 열심히 싸우는 회사였죠. 이것 때문에 97년 2월 결국 해고되긴 했지만요. 그때 해고되고 나서 다산을 만났어요. 다산에서 해고 싸움을 맡아줬는데… 안타깝게도 대법에서 패소했어요. 노개투 총파업 관련 해고는 복직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덕부진흥 노동자였던 탁충남 씨는 말했다. 기억해보면 모진 세월이었을 법도 한데 넉살좋게 웃으며 과거 이야기를 술술 들려주었다. 당시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싸우고 싶다며 과거를 기억하는 그를 보며, 아픈 과거가 아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라서 참 다행이라 여겼다. 1997년 덕부진흥에서 해고 이후 대법에서 패소, 그리고 다시 취업한 2군데의 회사에서도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 탁충남 씨는 현재 상조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지역과 노동자들의 삶과 운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자유롭게 출퇴근 할 수 있는 곳으로 고른 직장이란다.

"29살에 익산에서 올라와 덕부진흥에 취직했어요. 남들보다 수완이 좋았는지 잘 보였는지 한 달 반 만에 정규직이 되고. 그길로 노동조합 활동을 했죠. 그러면서 좋은 사람만나 결혼도 했죠. 첫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 해고가 된거죠. 아내는 만삭인데 해고가 돼서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예요. 회사에서 미행하니까. 그때는 미행, 납치, 감금 이런 게 우스웠으니까. 집에 아내 혼자 있는 게 걱정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찾아오면 '영장 제시해라' 요구하라고 미리 귀띔을 해줬죠.

그런데 진짜 경찰이 찾아온 거예요. 아내는 내 얘기만 듣고 '영장 제시해라'라고 하는데 영장이 있어야지. 그때 당시만 해도 노동부랑 경찰이랑 안기부가 다 짜고 일 처리하고 그랬으니까. 아내가 문을 안 열어주니까 만삭인 아내를 집안에 놓고 대문을 발로차고 난리가 아니었나 봐요. 그때 언론에도 이 기사가 실렸죠. 그만큼 잔인했어요."

아무리 후회 없는 과거라 할지라도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무언가는 있지 않겠나? 이런 개인사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며 빼다가 들려준 이야기에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온다. 이때 해고 싸움하면서 집에도 못 들어가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나이 터울이 꽤 난다며 사람 좋게 웃는 탁충남 씨. 그 웃음 뒤에는 가족과 함께 있어주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이 있었다.

"해고 싸움하니까 생계가 어렵죠. 아내는 마트에서 일했어요. 명동성당 천막투쟁. 회사 앞 투쟁으로 6개월 동안 집에 못 갔죠. 그때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게 있었어요. IMF 때문에. 나도 어떻게 그게 됐죠. 한 달에 29만 원씩 나오더라구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연대하러가서 덕부 해고잡니다 하면 다들 고생많다며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했어요. 벌이도 없고. 투쟁은 해야겠고. 집에 돈도 못 갖다 주는데 손도 못 벌리고. 조합원들이 생계비를 마련해주고, 이렇게 열심히 싸운다고 주변에서 도와줘서 대법원까지 간 거죠. 그때 한창 IMF때고, 저희가 그 즈음 싸움을 했으니까. 언론에서 취재도 많이 나오고 TV에도 많이 나왔어요. 근데 TV에 나온 제목이 '고개숙인 남자' 하면서 정리해고 돼서 그네타고 있는 남자로 나온 거예요.(웃음)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IMF때 정리해고로 한창 시끄러웠으니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국민 모두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던 국가부도 사태로 인해 나라는 휘청거렸다. 있는 이들의 탐욕이야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겠지만 없는 이들이야, 서로 따뜻한 밥 한 끼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졌을 때였다. 직장을 잃은, 갈 곳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등장했던 때였다. 직장에 다녀온다며 동네 놀이터를 전전하는 아빠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포착됐던 시절. 1997년 이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이후 사회는 냉랭하게 얼어붙어 왔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게 예의가 되어버리고, 외면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쉽게 쓰다버리는 노동이 늘고, 삶의 권리가 짓밟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1997년에서 시작된 그와의 이야기는 이제 201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 10월 19일 그러나 아직도 1997년

ⓒ다산인권센터



"97년 2월에 해고되고 대법까지 해고투쟁을 했죠. 그 무렵 덕부진흥이 천안 쪽으로 공장을 이전한다고 했어요. 정리해고 한다는 소문은 돌고 단체협약에서도 이주대책 보상도 못해주고, 직원들도 못 데리고 가고, 현지인을 채용하겠다고 해요. 고용불안 형태를 만들었죠. 그때 노조가 회사 측 문서를 입수했는데 거기에 잔업 거부 시 물량대응방안, 노조 대응에 대한 이론전개 방안, 노동부 및 경찰 등에 대한 협조방안 등 정리해고에 따른 노조반발을 예상해 치밀한 대응계획을 다 세워 놓았더라구요.

천안 공장 이전이후에 순환배치하고, 무급 휴직하는 건 다반사였고, 희망퇴직도 받고…. 그러니 자연 퇴사하는 사람도 늘어났죠. 그렇게 노조를 와해시켰어요. 요즘 문제 되고 있는 노조파괴 시나리오랑 비슷하죠? 이때 이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 더 치밀한 노조파괴 전략을 세우는 것 같아요. 그때 근처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용역이 상주하고 엄청나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런 공포감이 주변 노동조합으로 퍼져나갔죠. 요즘 창조컨설팅에서 노조 와해 하는 거 보면 꼭 옛날이랑 똑같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탁충남 씨는 15년 전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지금 들리는 것은 15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의 이야기였다. SJM에서의 폭력사태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겪었던 그것이,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의 현재가 15년 전 이야기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세월은 흘렀지만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아니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시간은 째깍째깍, 사회는 흐르는 시간마저 아쉬워 더 빨리 변해 가는데, 노동자들의 현실은 변하는 게 아쉬운지 아직도 15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고 회사는 잘 됐을까요? 노동조합 와해시키는 데는 성공했죠. 근데 회사도 망했어요. 나중에는 현대모비스에 흡수되어버렸어요. 요즘 들어 그런 생각도 해요. IMF 이후 대기업들이 중견기업들 다 흡수하고 그랬는데 노동조합 무너뜨리고 하는 게 다 인수하기 쉽게 하려고 한건 아닌지. 최근 창조컨설팅 뭐 이런 거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들더라구요. 그때 이후 법은 계속 개악되고 작은 기업들은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그래서 사회자체가 개인적으로 변했죠. 노동자들도 하도 노동자를 천대하니까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2012년 오늘을 살기 위해서

다산 20주년을 맞이하여 함께 했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찾아간 덕부진흥 해고노동자 탁충남 씨. 그의 1997년부터 기억을 기록하기보다는 그때부터 변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해가 뜰 때부터 따라오던 그림자처럼. 노동자의 현실을 조여 오는 사회의 모습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림자다. 1997년 덕부진흥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쌍용자동차가, 재능교육이, 한진중공업이, 유성기업이 그리고 열거하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고 있다.

노동자들과 삶을 나누기 위해 몸 살림을 시작했다는 탁충남 씨. 노동조합 교육시간에 가서도 몸 살림을 하고,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전히 마음 문을 열어놓고 있다. 15년 전 한 노동자가 겪었던 소용돌이는 그에게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의 가치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2명이 송전탑에 올랐다. 대법원에서 판결한 법을 이행하라는 외침이다. 법을 지키라고 목숨을 걸어야하는 현실. 이 사회는 왜 이토록 노동자에게 잔혹한가. 노동자라는 이름이 사라지면, 덕부진흥이 사라졌듯이 기업도 사라진다. 함께 살기 위한 노력. 더 이상 미루지 말자. 1997년과 2012년의 고통은 탁충남이라는 한 노동자들의 삶에서 지혜를 얻게 되길. 


■ 글 :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 원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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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osted at 2012. 10. 16. 11:32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한다. <편집자> 



화성 연쇄살인 범인 누명에 자살한 남편, 악몽은 아직도…
[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 노트에 써 있는 글이다. 영화는 경찰들의 눈으로 만났던 살인범에 대한 추억을 되짚고 있다. 정부가 시국사건에 경찰들을 떼로 몰고 다니던 그때 시골마을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힘없는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던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진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1986-1991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6년 동안 10차례의 강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71세 노인에서부터 13세 여중생까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한국사회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태안 지서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도경, 시경의 모든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금전 관계나 강도여부, 치정관계 등에 혐의를 두고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한국 경찰에게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미국 FBI처럼 프로파일링(Profiling) 수사도 없었고, 철저한 현장 보존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수사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저 형사들의 사명감과 지구력에 의존한 끊임없는 탐문 수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조리한 시대, 조악한 경찰조직의 말단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사건에 맞닥뜨린 그들에게 기댈 곳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원한 것은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고도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늘 기각되고 만다.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3천여 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단 1명의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만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남편, 어느날 갑자기…

가을 햇살이 곱게 내리는 주말 오후, 김영아 씨(가명)는 오전 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20년의 세월이 고단했을 법도한데 김영아 씨는 여전히 고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꺼내 놓은 낡은 사진 속에서 남편 유은태 씨(가명)는 듬직하게 웃고 있었다.

"단추공장 다닐 때 만났어요. 애들 아빠는 2층 섬유공장에 다녔어요. 사장님들끼리 서로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뭐 그런 거 있었나요. 그냥 사람 좋아 보이고 그러면 마음잡고 결혼해서 사는 거죠. 26살 때, 그 사람이 한 살 많으니까 27살이었어요. 전쟁 때 아버지 잃고 원호 대상자로 어렵게 살았다고 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사람이 듬직하고 좋아서 결혼 했어요."

그렇게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았다. 첫째가 딸, 둘째 셋째가 아들이었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하나씩 장만하는 맛이 있었다. 남편은 워낙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때 남편은 화성 인근의 큰 농장에 농장장으로 있었다. 남편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처음 화성경찰서에 잡혀갔을 때는 큰 걱정 안했어요. 워낙 소문난 사건이었고 인근에 있는 남자들은 다 조사받기도 하고 그래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몇 년 뒤에… 93년이던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한다고 할 때… 서대문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처음 올 때만 해도…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 김영아 씨의 남편과 아이들 사진. ⓒ다산인권센터



그때부터 김영아 씨의 말은 눈물과 한숨으로 이어지고 끊어지고를 반복했다. 왜 그렇지 않았겠나. 20년 동안 지속된 아픔이었다. 화성경찰서에서 무죄로 풀려났던 똑같은 사건은 몇 년 뒤 서대문 경찰서로 넘어갔다. 한 제보자에 의해서였다. 증거도 없고 혐의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잡혀간 남편은 서대문서에 간 3일 동안 모진 일들을 당하고 내려온다. 씨름대회도 나갔던 덩치 좋은 남편은 이후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뭐라고 해도 믿지 못 할 거예요. 그 3일 이후 애들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닫혀있는 방문을 보고도 문을 꼭 잠그라고 했어요. 경찰들이 또 아빠 잡으러 온다, 문 잠궈라… 삶에 대한 애착 이런 게 다 없어졌어요.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애들은 아직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단칸방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고문 받고 와서는 일도 안하고 술로 버텼어요. 그렇게 견디다 못해 자살한 거지…."

고문 뒤 달라진 남편의 인생

서대문서에 끌려가 3일 동안 당한 고문으로 유은태 씨의 인생은 달라져버렸다. 더 이상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못견뎌했고 괴로워했다. 자신이 당한 일을 허심탄회하게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김영아씨는 가정경제를 도맡았어야 했다. 술만 먹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본인도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저도 속이 상해서 술만 먹지 말고 이겨냈으면 했는데… 신랑 원망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라도 못살겠다 싶어요… 애들도 다 어렸을 때라… 한없이 불쌍하죠…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그걸 달래주고, 치료해주고… 요즘 같기만 했어도, 그렇게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험한 일 당해서 국가배상해서 위자료를 받았지만 그걸로 우리 생활이 보상되는 건 아니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달래주지 못하고…."

1997년 유은태 씨는 스스로 생을 놓았다. 고문 후유증과 자괴감이 이유였다.

"애들이 셋이나 되니까.…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도 1시까지 일했어요. 저녁에도 또 일하러 나가야 해요."

김영아 씨에게 삶은 전쟁과 같았다. 그렇게 떠난 남편.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위로 둘은 결혼하고 지금은 막내하고 둘이 살고 있다. 평범했던 한 가정에 닥쳤던 불행의 파도 중에도 그렇게 사람들은 묵묵히 살아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아빠를 제보하고 경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가족을 괴롭혔던 제보자 심양보(가명)는 아직도 그들에게 악마다.

"그때 당시에 누명 쓴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저희 같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당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경찰들하고 그 놈이 같이 다니면서 괴롭혔어요. 처음엔 그 놈이 경찰인 줄 알았어요. 살인사건… 피해자들 사진… 정말 끔찍해서 볼 수 없는 걸, 책으로 만들어서 저한테 보여줬어요. 니 남편이 이렇게 죽였다. 이걸 인정하면 돈 5000만 원 줘서 너희들은 살게 하겠다… 뭐 이랬는데, 내가 내 남편을 몰라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쫓아냈죠. 그런데 그놈이 지금도 우리를 이토록 괴롭힐 줄 그때는 몰랐던 거죠."

끝나지 않는 괴롭힘

심양보는 남편 유은태 씨의 죽음 이후에도 가족을 괴롭혔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유은태 씨고, 그의 죽음은 김영아 씨의 독살에 의해서라는 소설을 책으로 냈고 카페를 개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이 벌이지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었다.

"어느 날 장가간 아들이 책을 들고 온 거예요. 엄마 이게 뭐야… 그러면서 따져 물어요. 그때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들이 엄마를 불신한 거지. 너무 놀라서 애가 손을 벌벌 떨어요… 내가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김영아 씨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이 복받친 세월을 어떻게 말로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엄마와 아들은 1992년 당시 아빠의 무죄와 국가배상청구를 맡아줬던 김칠준 변호사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심양보의 책과 카페 글에 대한 출판 등 금지조치와 심양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되었다. 법원은 이에 대해 피고 심양보의 위자료 지금과 출판물에 대한 출판 금지를 판결하게 되었다.

"그 놈도 너무 나쁜 놈이고… 우리를 이 지경까지 만든 국가가 너무 미워요. 그때 그 경찰관들… 나쁜 놈한테 현혹돼서 같이 우리를 망쳐놨어. 반성도 없어. 우리는 죽거나 말거나 무차별적으로 그런거잖아요. 진정으로 사과라도 받으면 속이라도 편할텐데… 지금까지 우리한테 사과하러 온 사람 단 하나도 없었어요."


▲ 김영아 씨를 인터뷰 중인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다산인권센터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까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 일일까. 김영아 씨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었다고 돌아서면 될 일일까. 무능력했고 심지어 우악스러운 국가의 패악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개인들의 고통. 처음 다산이 만들어졌던 90년대 초반의 사건이 20년을 건넌 21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는 동안… 그 잘난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 초라한 인권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사건으로 또는 판결문으로 읽을 수 없는 김영아 씨의 눈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이 글을 마치고 알음알음 지인들을 모아 김영아씨와 가족들이 당한 아픔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심리 상담가도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유은태 씨의 무덤에 소주한잔도 올려야 하지 않겠나. 김영아 씨가 일한다는 곳에서 따뜻한 식사 한 끼도 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여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다운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억울한 삶들이 아직 도처에 있다. 그 눈물 닦아주기 위해 다시 20년의 걸음을 디뎌야 한다. 우리가 20년을 돌아보는 역사 속의 사람 이야기를 그래서 이렇게 시작한다.

■ 글 :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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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사]그사람 스무살 인권은 즐겁다[박여사]그사람 스무살 인권은 즐겁다

Posted at 2012. 10. 14. 22:14 | Posted in 20주년소식

초코파이 무서워요. ^^ 꼭 오셔야 해요~

  1. 디에고
    마구마구 퍼가도 되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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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과거사(?) 정리다산인권센터 20주년 기념...과거사(?) 정리

Posted at 2012. 10. 12. 16:12 | Posted in 20주년소식

1992년 8월 30일 한겨레 기사


맞아요. 현재의 다산인권센터는
위 사진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김칠준, 김동균 변호사님이
<다산인권상담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몸무게를 비롯해...(죄송...^^;)
하시는 역할도 많이 변화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법무법인 다산에서 인권변호사로서의 역할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97년 3월 1일자 한겨레 신문에도 당시 새롭게 소장에 취임한 
노정희 판사님의 인터뷰 기사도 실렸네요.
인권상담소가 필요없는 사회 만드는게 소원이셨는데...
아직 그 소원 이루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래서, 다산인권센터 그리고 인권운동이 더욱 필요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진 : 참세상

 
훨칠한 키에 수려한(?)외모로 소싯적에 날렸는지 어쨌는지 확인되진 않지만...^^;
다산인권센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 송원찬.
지금은 복지운동에 헌신(?)하고 계시면서 
다산인권센터 20주년 준비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계신 분이기도 합니다.
(원고 좀 제때 주세요ㅠㅠ)
사진에 보이는 2003년 네이스 반대투쟁 당시 단식투쟁 '8일'만에...
탈진해서 병원에 후송되기도 했었는데요.

노숙단식농성 이레째 소식 - 송원찬 활동가 탈진으로 쓰러져 중


 
(체력을 기르셔야...^^;)
 
여튼 지금도 틈만나면 뭔가를 꾸미는 '전략가' 이미지로
고민과 활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사진 : YTN 영상 캡쳐


아..이 분...
(사진에 태클걸지 마셈...^^;)
2005년 8월 3일 모 방송국과 인터뷰하신 분인데요....
상임활동위원으로 나왔네요. 
이 분 모르면 **이라고 할 정도로 오지랖 넒으신 분.
세상의 모든 인권사안은 자기가 다 싸짊어 가야 마음이 편한 분.
덕분에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쪼...끔...힘들다는 거 빼고...
아...또..가끔 혼자 욕하는 거 빼고...(다 들리거든요...)
아...또...뭐가 있더라...(많은데...) 
여튼 뺄거 빼고 아주 훌륭하신 이 분과 덩달아 유명해진 딸(땅콩)까지.

인권운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 사람들을 10월 27일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분들 뿐만아니라 다산인권센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땀이 녹아있답니다.
그 사람들을 10월 27일 수원인계동 삼호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안 오시면...
ㅠㅠ...

우리....27일날 꼭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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