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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입장•성명

[기고]무책임한 침묵

노땡큐

무책임한 침묵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981년 황석영과 김종률, 광주 지역 노래패는 5월18일을 그냥 지나 보낼 수 없었다. 그 전해 벌어진 항쟁을 기억하며 노래극을 만들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에 삽입된 곡이었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이었다. 둘은 연인이었다. 가사는 당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이 붙였다. 곡은 이듬해 1982년 윤상원, 박기순의 유해를 합장하는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공개됐다. 조악한 테이프에 녹음된 노래는 빠르게 번져나갔다.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입장이 나왔다. 알아서 따라 부르든지 말든지, 였다. 기념식에 참석한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쪽 인사들은 합창이 되어 흘러나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았다. 완고하게 다문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뒤질세라 항쟁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말했다. “나는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과 그의 말 사이 간격은 좁았다. 항쟁의 마지막 날 새벽, 옛 전남도청 옥상에 있던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에 울려퍼졌던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진주해오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목소리의 주인공 박영순씨는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복역하다 6개월 만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날 그녀는 마지막 방송을 한 뒤 내용이 적힌 쪽지를 삼켰다. 그 목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죽기도 했고, 살아남기도 했다.


5·18의 어머니들이 세월호 어머니들을 안아주며 말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통곡을 품은 자들이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입을 다문 자들과 입을 연 자, 그들은 5·18 광주에서 죽은 자,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4살 남자아이 목을 관통한 총상, 주검을 집에 가져와서도 숨진 사실을 숨겨야 했던 이들의 비참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살돼 암매장된 비무장 민간인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진압경찰과 군인 사망자를 바라보는 고통도 모른다.


그들이 침묵하거나 입을 놀리는 이유는 같다. 책임지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해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사장에게 사직서를 낸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서슬 퍼런 시절에도 침묵이 부끄러워 펜을 놓았던 기자들이 있었다. 36년이 흘러 노래하지 않는 이 정부의 침묵은 어떤 부끄러움일까. 노래조차 부르지 못하는 곳에서, 노래는 주어다. 그러하기에 죽은 자가 앞서 간 길, 산 자들은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016.5.28  한겨레21 '노땡큐'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이 글은 <한겨레> 2014년 12월5일치에서 ‘5·27 도청 방송’이 확인된 박영순씨 사례와 위키백과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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