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그때 그사람 ②]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Posted at 2012.10.22 14:51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 한다. <편집자> 



"알고 있나? 1997, 그들의 삶을…
[그때 그사람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의 삶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인기가 대단했다. HOT를 좋아한 여고생과 그 친구들이 성장기. '응답하라1997'은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고, 그 추억은 아련한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워크맨과 삐삐의 아날로그 감수성은 지금의 것과는 다른 무엇이었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좋아했던 그 과거는 기억만으로도 아름다웠을테니까. 나도 바로 그 세대다.

1997년 고등학교시절을 보낸. 그 당시 모든 10대 청춘들이 겪었던 것처럼 HOT 앓이를 했고, 그들을 위해 풍선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직 어렸기에 15년 전 내가 보았던 세상은 그저 아무 문제없이 평온한 그런 세상이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위기였다는 IMF를 TV속 이야기처럼 바라보았던 '응답하라 1997'에 나오는 그런 1997년도처럼….

하지만 내가 보냈던 평온한 일상의 시간과 다른 1997년을 보낸 이들이 있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7'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 검색결과도 그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걸 희미하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는 과거는 시간의 힘을 빌어 재생되지만, 스스로 기억해야 하는 과거는 애써 꺼내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하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 더 희미해지기 전에. '응답하라 1997'의 청춘들과는 다른, 나와는 다른, 또 다른 1997년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1997년 다산과 함께 했던 덕부진흥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말이다.
 

▲ 탁충남 씨. ⓒ다산인권센터



알고있나? 1997, 그들의 삶을…

"1996년 노개투 총파업이 있었어요. 노동법 개악안이 날치기 통과 된 것을 회사 가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때 파업을 했어요. 안산지역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덕부진흥과 한국후꼬구는 안산에서 유명한 회사였어요. 노동조합도 탄탄하고, 결속력도 좋았으니까요. 이날 민주노총 파업지침은 11시였는데 우리는 먼저 파업을 했어요. 그만큼 열심히 싸우는 회사였죠. 이것 때문에 97년 2월 결국 해고되긴 했지만요. 그때 해고되고 나서 다산을 만났어요. 다산에서 해고 싸움을 맡아줬는데… 안타깝게도 대법에서 패소했어요. 노개투 총파업 관련 해고는 복직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덕부진흥 노동자였던 탁충남 씨는 말했다. 기억해보면 모진 세월이었을 법도 한데 넉살좋게 웃으며 과거 이야기를 술술 들려주었다. 당시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싸우고 싶다며 과거를 기억하는 그를 보며, 아픈 과거가 아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라서 참 다행이라 여겼다. 1997년 덕부진흥에서 해고 이후 대법에서 패소, 그리고 다시 취업한 2군데의 회사에서도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 탁충남 씨는 현재 상조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지역과 노동자들의 삶과 운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자유롭게 출퇴근 할 수 있는 곳으로 고른 직장이란다.

"29살에 익산에서 올라와 덕부진흥에 취직했어요. 남들보다 수완이 좋았는지 잘 보였는지 한 달 반 만에 정규직이 되고. 그길로 노동조합 활동을 했죠. 그러면서 좋은 사람만나 결혼도 했죠. 첫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 해고가 된거죠. 아내는 만삭인데 해고가 돼서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예요. 회사에서 미행하니까. 그때는 미행, 납치, 감금 이런 게 우스웠으니까. 집에 아내 혼자 있는 게 걱정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찾아오면 '영장 제시해라' 요구하라고 미리 귀띔을 해줬죠.

그런데 진짜 경찰이 찾아온 거예요. 아내는 내 얘기만 듣고 '영장 제시해라'라고 하는데 영장이 있어야지. 그때 당시만 해도 노동부랑 경찰이랑 안기부가 다 짜고 일 처리하고 그랬으니까. 아내가 문을 안 열어주니까 만삭인 아내를 집안에 놓고 대문을 발로차고 난리가 아니었나 봐요. 그때 언론에도 이 기사가 실렸죠. 그만큼 잔인했어요."

아무리 후회 없는 과거라 할지라도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무언가는 있지 않겠나? 이런 개인사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며 빼다가 들려준 이야기에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온다. 이때 해고 싸움하면서 집에도 못 들어가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나이 터울이 꽤 난다며 사람 좋게 웃는 탁충남 씨. 그 웃음 뒤에는 가족과 함께 있어주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이 있었다.

"해고 싸움하니까 생계가 어렵죠. 아내는 마트에서 일했어요. 명동성당 천막투쟁. 회사 앞 투쟁으로 6개월 동안 집에 못 갔죠. 그때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게 있었어요. IMF 때문에. 나도 어떻게 그게 됐죠. 한 달에 29만 원씩 나오더라구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연대하러가서 덕부 해고잡니다 하면 다들 고생많다며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했어요. 벌이도 없고. 투쟁은 해야겠고. 집에 돈도 못 갖다 주는데 손도 못 벌리고. 조합원들이 생계비를 마련해주고, 이렇게 열심히 싸운다고 주변에서 도와줘서 대법원까지 간 거죠. 그때 한창 IMF때고, 저희가 그 즈음 싸움을 했으니까. 언론에서 취재도 많이 나오고 TV에도 많이 나왔어요. 근데 TV에 나온 제목이 '고개숙인 남자' 하면서 정리해고 돼서 그네타고 있는 남자로 나온 거예요.(웃음)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IMF때 정리해고로 한창 시끄러웠으니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국민 모두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던 국가부도 사태로 인해 나라는 휘청거렸다. 있는 이들의 탐욕이야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겠지만 없는 이들이야, 서로 따뜻한 밥 한 끼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졌을 때였다. 직장을 잃은, 갈 곳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등장했던 때였다. 직장에 다녀온다며 동네 놀이터를 전전하는 아빠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포착됐던 시절. 1997년 이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이후 사회는 냉랭하게 얼어붙어 왔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게 예의가 되어버리고, 외면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쉽게 쓰다버리는 노동이 늘고, 삶의 권리가 짓밟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1997년에서 시작된 그와의 이야기는 이제 201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 10월 19일 그러나 아직도 1997년

ⓒ다산인권센터



"97년 2월에 해고되고 대법까지 해고투쟁을 했죠. 그 무렵 덕부진흥이 천안 쪽으로 공장을 이전한다고 했어요. 정리해고 한다는 소문은 돌고 단체협약에서도 이주대책 보상도 못해주고, 직원들도 못 데리고 가고, 현지인을 채용하겠다고 해요. 고용불안 형태를 만들었죠. 그때 노조가 회사 측 문서를 입수했는데 거기에 잔업 거부 시 물량대응방안, 노조 대응에 대한 이론전개 방안, 노동부 및 경찰 등에 대한 협조방안 등 정리해고에 따른 노조반발을 예상해 치밀한 대응계획을 다 세워 놓았더라구요.

천안 공장 이전이후에 순환배치하고, 무급 휴직하는 건 다반사였고, 희망퇴직도 받고…. 그러니 자연 퇴사하는 사람도 늘어났죠. 그렇게 노조를 와해시켰어요. 요즘 문제 되고 있는 노조파괴 시나리오랑 비슷하죠? 이때 이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 더 치밀한 노조파괴 전략을 세우는 것 같아요. 그때 근처에 한국 후꼬꾸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용역이 상주하고 엄청나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런 공포감이 주변 노동조합으로 퍼져나갔죠. 요즘 창조컨설팅에서 노조 와해 하는 거 보면 꼭 옛날이랑 똑같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탁충남 씨는 15년 전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지금 들리는 것은 15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의 이야기였다. SJM에서의 폭력사태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겪었던 그것이,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의 현재가 15년 전 이야기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세월은 흘렀지만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아니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시간은 째깍째깍, 사회는 흐르는 시간마저 아쉬워 더 빨리 변해 가는데, 노동자들의 현실은 변하는 게 아쉬운지 아직도 15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고 회사는 잘 됐을까요? 노동조합 와해시키는 데는 성공했죠. 근데 회사도 망했어요. 나중에는 현대모비스에 흡수되어버렸어요. 요즘 들어 그런 생각도 해요. IMF 이후 대기업들이 중견기업들 다 흡수하고 그랬는데 노동조합 무너뜨리고 하는 게 다 인수하기 쉽게 하려고 한건 아닌지. 최근 창조컨설팅 뭐 이런 거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들더라구요. 그때 이후 법은 계속 개악되고 작은 기업들은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그래서 사회자체가 개인적으로 변했죠. 노동자들도 하도 노동자를 천대하니까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2012년 오늘을 살기 위해서

다산 20주년을 맞이하여 함께 했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찾아간 덕부진흥 해고노동자 탁충남 씨. 그의 1997년부터 기억을 기록하기보다는 그때부터 변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해가 뜰 때부터 따라오던 그림자처럼. 노동자의 현실을 조여 오는 사회의 모습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림자다. 1997년 덕부진흥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쌍용자동차가, 재능교육이, 한진중공업이, 유성기업이 그리고 열거하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고 있다.

노동자들과 삶을 나누기 위해 몸 살림을 시작했다는 탁충남 씨. 노동조합 교육시간에 가서도 몸 살림을 하고,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전히 마음 문을 열어놓고 있다. 15년 전 한 노동자가 겪었던 소용돌이는 그에게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의 가치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2명이 송전탑에 올랐다. 대법원에서 판결한 법을 이행하라는 외침이다. 법을 지키라고 목숨을 걸어야하는 현실. 이 사회는 왜 이토록 노동자에게 잔혹한가. 노동자라는 이름이 사라지면, 덕부진흥이 사라졌듯이 기업도 사라진다. 함께 살기 위한 노력. 더 이상 미루지 말자. 1997년과 2012년의 고통은 탁충남이라는 한 노동자들의 삶에서 지혜를 얻게 되길. 


■ 글 :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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