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osted at 2012.10.16 11:32 | Posted in 20주년소식/그때 그 사람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20년 전 다산인권상담소 시절부터 현재까지 만났던 인권피해자들과 인권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함께한다. <편집자> 



화성 연쇄살인 범인 누명에 자살한 남편, 악몽은 아직도…
[그때 그사람 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 노트에 써 있는 글이다. 영화는 경찰들의 눈으로 만났던 살인범에 대한 추억을 되짚고 있다. 정부가 시국사건에 경찰들을 떼로 몰고 다니던 그때 시골마을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힘없는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던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진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1986-1991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6년 동안 10차례의 강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71세 노인에서부터 13세 여중생까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한국사회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태안 지서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도경, 시경의 모든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금전 관계나 강도여부, 치정관계 등에 혐의를 두고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한국 경찰에게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미국 FBI처럼 프로파일링(Profiling) 수사도 없었고, 철저한 현장 보존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수사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저 형사들의 사명감과 지구력에 의존한 끊임없는 탐문 수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조리한 시대, 조악한 경찰조직의 말단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사건에 맞닥뜨린 그들에게 기댈 곳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원한 것은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고도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늘 기각되고 만다.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3천여 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단 1명의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만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남편, 어느날 갑자기…

가을 햇살이 곱게 내리는 주말 오후, 김영아 씨(가명)는 오전 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20년의 세월이 고단했을 법도한데 김영아 씨는 여전히 고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꺼내 놓은 낡은 사진 속에서 남편 유은태 씨(가명)는 듬직하게 웃고 있었다.

"단추공장 다닐 때 만났어요. 애들 아빠는 2층 섬유공장에 다녔어요. 사장님들끼리 서로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뭐 그런 거 있었나요. 그냥 사람 좋아 보이고 그러면 마음잡고 결혼해서 사는 거죠. 26살 때, 그 사람이 한 살 많으니까 27살이었어요. 전쟁 때 아버지 잃고 원호 대상자로 어렵게 살았다고 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사람이 듬직하고 좋아서 결혼 했어요."

그렇게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았다. 첫째가 딸, 둘째 셋째가 아들이었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하나씩 장만하는 맛이 있었다. 남편은 워낙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때 남편은 화성 인근의 큰 농장에 농장장으로 있었다. 남편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처음 화성경찰서에 잡혀갔을 때는 큰 걱정 안했어요. 워낙 소문난 사건이었고 인근에 있는 남자들은 다 조사받기도 하고 그래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몇 년 뒤에… 93년이던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한다고 할 때… 서대문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처음 올 때만 해도…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 김영아 씨의 남편과 아이들 사진. ⓒ다산인권센터



그때부터 김영아 씨의 말은 눈물과 한숨으로 이어지고 끊어지고를 반복했다. 왜 그렇지 않았겠나. 20년 동안 지속된 아픔이었다. 화성경찰서에서 무죄로 풀려났던 똑같은 사건은 몇 년 뒤 서대문 경찰서로 넘어갔다. 한 제보자에 의해서였다. 증거도 없고 혐의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잡혀간 남편은 서대문서에 간 3일 동안 모진 일들을 당하고 내려온다. 씨름대회도 나갔던 덩치 좋은 남편은 이후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뭐라고 해도 믿지 못 할 거예요. 그 3일 이후 애들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닫혀있는 방문을 보고도 문을 꼭 잠그라고 했어요. 경찰들이 또 아빠 잡으러 온다, 문 잠궈라… 삶에 대한 애착 이런 게 다 없어졌어요.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애들은 아직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단칸방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고문 받고 와서는 일도 안하고 술로 버텼어요. 그렇게 견디다 못해 자살한 거지…."

고문 뒤 달라진 남편의 인생

서대문서에 끌려가 3일 동안 당한 고문으로 유은태 씨의 인생은 달라져버렸다. 더 이상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못견뎌했고 괴로워했다. 자신이 당한 일을 허심탄회하게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김영아씨는 가정경제를 도맡았어야 했다. 술만 먹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본인도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저도 속이 상해서 술만 먹지 말고 이겨냈으면 했는데… 신랑 원망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라도 못살겠다 싶어요… 애들도 다 어렸을 때라… 한없이 불쌍하죠…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그걸 달래주고, 치료해주고… 요즘 같기만 했어도, 그렇게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험한 일 당해서 국가배상해서 위자료를 받았지만 그걸로 우리 생활이 보상되는 건 아니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달래주지 못하고…."

1997년 유은태 씨는 스스로 생을 놓았다. 고문 후유증과 자괴감이 이유였다.

"애들이 셋이나 되니까.…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도 1시까지 일했어요. 저녁에도 또 일하러 나가야 해요."

김영아 씨에게 삶은 전쟁과 같았다. 그렇게 떠난 남편.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위로 둘은 결혼하고 지금은 막내하고 둘이 살고 있다. 평범했던 한 가정에 닥쳤던 불행의 파도 중에도 그렇게 사람들은 묵묵히 살아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아빠를 제보하고 경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가족을 괴롭혔던 제보자 심양보(가명)는 아직도 그들에게 악마다.

"그때 당시에 누명 쓴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저희 같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당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경찰들하고 그 놈이 같이 다니면서 괴롭혔어요. 처음엔 그 놈이 경찰인 줄 알았어요. 살인사건… 피해자들 사진… 정말 끔찍해서 볼 수 없는 걸, 책으로 만들어서 저한테 보여줬어요. 니 남편이 이렇게 죽였다. 이걸 인정하면 돈 5000만 원 줘서 너희들은 살게 하겠다… 뭐 이랬는데, 내가 내 남편을 몰라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쫓아냈죠. 그런데 그놈이 지금도 우리를 이토록 괴롭힐 줄 그때는 몰랐던 거죠."

끝나지 않는 괴롭힘

심양보는 남편 유은태 씨의 죽음 이후에도 가족을 괴롭혔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유은태 씨고, 그의 죽음은 김영아 씨의 독살에 의해서라는 소설을 책으로 냈고 카페를 개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이 벌이지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었다.

"어느 날 장가간 아들이 책을 들고 온 거예요. 엄마 이게 뭐야… 그러면서 따져 물어요. 그때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들이 엄마를 불신한 거지. 너무 놀라서 애가 손을 벌벌 떨어요… 내가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김영아 씨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이 복받친 세월을 어떻게 말로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엄마와 아들은 1992년 당시 아빠의 무죄와 국가배상청구를 맡아줬던 김칠준 변호사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심양보의 책과 카페 글에 대한 출판 등 금지조치와 심양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되었다. 법원은 이에 대해 피고 심양보의 위자료 지금과 출판물에 대한 출판 금지를 판결하게 되었다.

"그 놈도 너무 나쁜 놈이고… 우리를 이 지경까지 만든 국가가 너무 미워요. 그때 그 경찰관들… 나쁜 놈한테 현혹돼서 같이 우리를 망쳐놨어. 반성도 없어. 우리는 죽거나 말거나 무차별적으로 그런거잖아요. 진정으로 사과라도 받으면 속이라도 편할텐데… 지금까지 우리한테 사과하러 온 사람 단 하나도 없었어요."


▲ 김영아 씨를 인터뷰 중인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다산인권센터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까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 일일까. 김영아 씨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었다고 돌아서면 될 일일까. 무능력했고 심지어 우악스러운 국가의 패악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개인들의 고통. 처음 다산이 만들어졌던 90년대 초반의 사건이 20년을 건넌 21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는 동안… 그 잘난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 초라한 인권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사건으로 또는 판결문으로 읽을 수 없는 김영아 씨의 눈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이 글을 마치고 알음알음 지인들을 모아 김영아씨와 가족들이 당한 아픔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심리 상담가도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유은태 씨의 무덤에 소주한잔도 올려야 하지 않겠나. 김영아 씨가 일한다는 곳에서 따뜻한 식사 한 끼도 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여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다운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억울한 삶들이 아직 도처에 있다. 그 눈물 닦아주기 위해 다시 20년의 걸음을 디뎌야 한다. 우리가 20년을 돌아보는 역사 속의 사람 이야기를 그래서 이렇게 시작한다.

■ 글 :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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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_ 선지영나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_ 선지영

Posted at 2011.11.16 17:59 | Posted in 격주간 <다산인권>/인권이슈/현장


- 살인누명을 쓴 정모씨의 형집행을 정지하라.
- 검·경의 사회적 약자를 향한 용의자 무작위 색출 더는 지켜볼 수 없다.

2007년 5월 수원 한 고등학교 옆 화단에서 여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당시 지문을 감식하여 신원을 파악하려 했지만, 미성년자여서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살 고 있었는지 등이 확인되지 않아 언론과 아고라 등을 통해서 신원확인을 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공개하여 가족을 찾아준 사건이 있었다. 집을 나와 친구들과 노숙을 하던 (당시)15세 소녀는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증인이나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고,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며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이 사건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범을 찾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범인으로 밝혀진 용의자는 현재까지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재수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건의 이면에는 많은 인권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으며,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빈곤과 차별의 양상을 마주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사전의 경과를 설명하면, 당시 살해용의자로 검거된 노숙인(지적장애 2급) 정모씨와 강모씨에게 경찰은 자백을 받아냈다. 이 중 정모씨는 사건에 대한 중함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1심재판 징역 7년 선고를 받게 되었고, 징역선고 후 항소를 통해 무죄를 주장했으나 2심재판에서 받아드려지지 않고 유죄를 인정, 징역 5년 형이 선고 되었다. 이후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제보를 검찰이 받게 되어 재수사를 하는 과정에 10대 노숙청소년 4명을 다시 검거하였다. 노숙청소년들과 노숙인 정모씨, 강모씨는 또 다시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우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무죄를 주장했지만, 유죄 판결에 대한 위증의 혐의만 더 가해지게 되었다. 현재 정모씨는 유죄판결이 확정되어 징역 5년형을 받아 4년 6개월을 복역하고 있고 공범으로 지목당한 10대 노숙청소년들과 강모씨는 국선변호인의 도움으로 2심에서 무죄판결 받았다. 하지만, 정모씨는 아직까지도 형을 계속 살고 있으며 함께 기소된 바 있는 핵심증인인 강모씨의 “정모씨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증언이 위증이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선고일 2011. 11. 7)까지 내려졌음에도, 여전히 정모씨는 수감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검·경의 편법 수사

우리사회 노숙인이 많이 집결하는 곳이 역 주변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정보와 집단이 형성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중 서울역과 수원역에 특히 노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2007년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수원역 근처 영아유기사체가 발견되어 지적장애 2급의 노숙소녀(17세)를 용의자로 검거하여 검·경이 수사한 사건이 있었다. 구강DNA체취 결과 용의자와 사망한 영아가 일치 하지 않음이 국과수로 부터 결정이 나왔지만 검·경은 지적장애 노숙소녀를 통해 사건을 진척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으로 범인이 아닌 용의자를 풀어주지 않고 14일간 강제구금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과 이번 노숙인 살인누명의 사건 담당 경찰이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 와 같은 사건이 한 경찰의 인권의식 부족과 범죄해결 성과내기식의 배경만의 문제로 이러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용의자로 지목당한 피의자의 상황이 동일하다. 우리사회에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노숙인, 자기변호와 항변이 약한 지적장애인 이라는 점이 일치한다. 최근 들어 사건 용의자가 확실치 않아 보이면 경찰은 제일 먼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인다. 그리고 일단 사건발생 지점과 시기에 근처에 한 노숙인이 있었다는 진술이 확보되면 검거하여 짜맞추기식 수사를 진행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사회에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노숙인과 장애인이 범인으로 오인을 받게 되고, 자신의 죄을 항변하는데도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재판과정에 중요시되지 않고 검찰과 경찰의 사건해결에 판단근거로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이 사건의 중심에는 우리사회에 노숙인과 장애인은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인식이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 우리 헌법 제10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한 가치가 있다라고 나와 있지만 검·경의 사건수사진행의 과정에서는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노숙인과 장애인을 바라 볼 때 경시해서는 않 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린 결과로 이와 같은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속출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돈 없고, 힘없고, 지지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국가가 책임져야하는 당사자들을 검찰과 경찰은 더욱 괄시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낮은 인식이 무죄를 주장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2차 가해를 일으켜 자기불신과 사회적으로 무력한 존재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검·경의 뻔뻔한 작태에 분노

“나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고 이번 사건에 무죄를 주장하는 정모씨에게 자기 항변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 무죄가 밝혀진 마당에도 죄인 취급하는 검찰과 경찰의 작태를 더 이상 지켜 볼 수가 없다.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은 엄청난 죄를 짓고도 휠체어를 타고 감옥을 나올 수 있지만 가진 것 없는 정모씨와 같은 약자들은 죄를 짓지 않고도 수년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런 불평등한 사실 이면에는 죄를 조작하고 범죄해결을 성과주의식 편의행정으로만 바라고는 검찰과 경찰의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지난 11월 8일 경기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행되는 검찰과 경찰의 불법과 부도덕함을 알리고 정모씨의 형집행 정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또한, 국가인권위에 같은 날 긴급구제 신청을 하였으며 지역단체들은 앞으로 파렴치한 검·경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노숙인과 장애인의 변론권 마련을 위한 정책활동 전개할 것이다.
 
■ 선지영님은 경기복지시민연대 사무국장입니다.
■ 본 기사는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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