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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칼럼

[다산&프레시안 공동기획]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③


참 MB스러운 사건, 평범한 주부들은 왜 나섰나?

[폭력에 내던져진 노동자들·③] 귀족 노조? 죽도록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글 : 정미현 국가기관 무기계약 노동자
 프레시안 기사 원문보기 

지난 5년 동안 MB의 혁혁한 공은 분노의 무감화다. 매번 분노하다가는 명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국민들 스스로 아픈 것을 아프지 않은 것으로 오판하게 만들었다. "동물 중성화 수술도 아니고 이거 원" 하면서도 사람들은 분노에 둔감해졌다. MB의 수에 이미 말린 나는 SJM 사건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회사에서 꼼수를 부려 노조가 한마디 했더니 회사가 문을 닫아버렸다. 황당한 노동자들 뭐라 한 마디 더하니 용역을 불러 두들겨 팼고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 "나는 아무한테도 손 안 댔다"며 깔끔하게 마무리 진 사건. 참 MB스러운 사건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다산인권센터에서 벗바리 자격으로 SJM 사건을 인터뷰 해달라고 했다. 살짝 걱정스러웠다. 깔끔하게 정리한 사건에서 "진실"을 볼까봐, "사람"을 볼까봐, 그래서 마음을 다칠까봐.

허나 약속은 약속, SJM노조 가족대책위 대표 김활신(이하 그녀) 씨를 만났다.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는 입에서 단내라도 날 듯 바빠 보였다. 역시나 SJM 앞에서 문화제가 있었는데 율동을 하고 저녁도 안 먹고 달려왔다. 내가 건넸던 스카치캔디 두 개와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율동이었냐고 물으니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라고 했다. 군데군데 흰 서리가 내려앉은 사십대 후반 여성의 율동이라…. 노조원 부인 7명이 함께 했다고 했다. 두 시간씩 며칠간의 훈련 끝에 오늘 자리에 섰다고 한다. 선한 듯, 수줍은 듯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꺼내는데 괜히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 김활신 SJM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다산인권센터



"다 같이 하면 이기는 거다"

가족모임은 4-5년 전에 결성되었고 활동이 뜸하다가 이번 일로 다시 모였다. 가족대책위의 분위기는 아직까지는 "다 같이 하면 이기는 거다"는 분위기. 사실 SJM 는 안산지역에서 근로조건도 좋고 노사상생의 모범 기업처럼 알려진 회사였다. 가끔 노사협상 과정에서 잡음은 있었으나 원만히 타협이 되었고 그만큼 노동자들도 회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실제 딱 한명의 비정규직이 있었고 그 역시 노조 가입을 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던 회사가 3년 전 노무이사가 바뀐 후부터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2011년 초부터 구조조정설을 유포하며 노조원들을 자극했다. 단체협약을 무시하는 일들도 빈번해졌다. 노사 협의도 없이 비정규직을 투입하더니 제 3공장 식당을 외주로 돌려버렸다. 해명을 요구하던 조합원들에게 돌아온 건 컨택터스라는 경비용역깡패의 투입이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회사를 아들한테 물려주려는데 노조를 어떻게든 무력화 시켜야 한다는 회장의 강박이 적지 않게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적인 분배로 회사 운영하면 바보되는 사회"

이 부분에서 그녀의 톤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주회사 만들어 내부 차액을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정상적인 분배로 회사 운영하면 바보가 되는 사회, 경영합리화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들을 헌신짝처럼 내치는 사회, 천박한 자본주의가 계속 되는 한 제2의 SJM, 제2의 쌍용은 계속 될 거라고 했다. 회사를 믿었던 만큼 노조원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컸다. 해고가 되더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 터라 결집력은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일 새벽 3시, 연락 받고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담을 넘어 농성자들과 함께 했고, 직장 폐쇄 첫날에는 노조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현장 최고직급인 기장 한분이 "평소에 조합이 하는 일을 같이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함께 하겠다"고도 했다. 우리 안에 모르고 있던 연대의 느낌, 동료애를 느끼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더 단단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대학생 딸을 둔 노조원은 다른 노조원 자녀들 과외활동을 추진해 보겠다고 했고, 맞벌이 나가는 부인은 평소에 참여 못해 미안하다며 주말에 나와 일일이 인사를 다닌다고 한다. 노조와 가족대책위는 아직까지는 모이면 신나고 희망적이라고 했다. 물론 9월 5일부터 월급이 안 나오고, 추석이 지나고 사건이 장기화되면 다들 각오를 해야겠지만 아직까지는 현재만 보고 달리고 싶다고 했다.

뭘 각오해야 되는 것일까? 평균 근속 년수 20년인 SJM 노동자들의 평범한 삶 속에 찾아든 각오는 뭘까?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 97년 결혼했고 남편은 원래 대우조선을 다녔다고 한다. 남편은 젊은 사람들이 산재로, 과로로 퍽 퍽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회사를 나와 99년에 SJM에 입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안산지역에서 평준화 운동, 무상 급식조례 제정 활동을 했다. 지난한 노력 끝에 다행히도 2013년부터 안산지역이 평준화될 예정이고 무상급식 문제도 나름 성과를 냈다. 성공의 경험이 지금 큰 밑천이 된다고 했다.

귀족 노조? 죽도록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남편 연봉은 5000만 원 정도다. 먹고 싶은 거 먹고, 걱정 않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가끔씩 가족 여행도 다닌다. 비교적 넉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귀족노조라는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 현재의 주간연속 2교대가 시작되기 전인 작년까지, 주야간 2교대, 주말 특근 한 두 번을 포함하여 한 달 100시간 이상의 잔업을 해야 했다. 일하는 동안에는 죽도록 일한다.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생산직 노동자가 돈 많이 받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노동자들도 스스로 귀족노동자라는 언어에 갇혀 주눅이 들어있다. 왜 정당하게 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데 눈치를 보는가? 정상적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문제다. 법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녀는 최근 대학원에 입학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 쫓아내고, 쫓겨난 노동자는 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복직을 위해 싸워야 하고, 긴 세월 싸워 복직해도 다시 해고되고 마는 사회. 분명히 정상이 아닌데 버젓이 그렇게 세상이 돌아간다. 사실 노동운동이 세상의 변화를 못 쫓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왜소화되거나,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대학원에 진학했다. 노동자협동조합 쪽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

쌍용 문제에 대해서도 그녀는 단호했다. 주저 않고 말했다. 국가에서 '사람'을 버린 사건이라고. 이번 일로 도움을 받으면서 어렵게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노조원들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업장을 지지방문도 하고 구체적인 연대의 길도 모색하고 있다.

ⓒ다산인권센터




엄마들 나서다

평범한 주부들이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편이 뼈 빠지게 일하던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 욕심내지 않고 살았다. 안정적일 뿐 사치부리며 살지 않았다. 그런데 남의 얘긴 줄만 알았던 직장이 폐쇄되고 남편이 농성을 시작했다. 빨간 띠와 검정 조끼를 두르면 다 빨갱이 같고, 강성 같고, 딴 나라 얘기 같았는데 남편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른바 빨갱이로 낙인찍힌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같이 모이니 자꾸만 힘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에 놀라워하고 있다. 나날이 배운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희망 같은 것,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렵지만 그렇게 가야 된다는 믿음. 그녀는 확신한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우린 모두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그들의 믿음이, 그녀의 확신이 빠른 시일 안에 검증되기를, 그리고 무감화된 분노가 다시 우리 안에 용트림 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간절히!